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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열로 이름 높으신 분

손돌(孫乭)

남쪽으로 한강변을 끼고 있는 현석동에는 목숨을 바쳐 왕의 안전을 지켰던 손돌에 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고려중기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피신할 때인 고종시대가 아니면 후금의 침입을 받아 천도의 길을 떠난 조선시대 인조임금 때가 된다.

이지함(李之函)

토정 이지함이 살던 곳은 마포대교 남쪽 입체교차로변의 유수지 옆이었다. 해방 직후까지도 토정동에는 토정의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터가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토정동의 옛 고을 이름에 아랫토정, 윗 토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예전부터 토정리로 불리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지함(1517~1578)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기인(奇人)으로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형백(馨伯)·형중(馨中), 호는 수산(水山).토정(土亭)이다. 그는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지번(之番)에게 글을 배우다가 후에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가 후일 수리(數理).의학(醫學).복서(卜書).천문(天文).지리(地理) 등에 달통하게 된 것도 스승인 서경덕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1573년 주민들의 추천으로 저정에 천거되어 청하(淸河)현감이 되었는데, 재직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전하고 있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1578년에 다시 아산현감으로 등용되었다. 이때 이지함은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정착지가 없는 걸인을 구제하였으며, 노약자와 기인을 구호하였다. 또한 당시 아산에서는 무거운 세금과 궁핍한 살림살이로 인해 나이 50~60세가 되도록 혼인하지 못하는 백성들이 허다하였다. 일반 백성은 물론이고 관아의 아전까지도 총각으로 늙어가는 것이었다. 이들의 처지를 딱히 여긴 이지함은 이같은 백성의 어려움을 국왕이 보살펴주기를 바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가 토정이라는 호를 얻게 된 것은 생애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 살면서 청빈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점차 널리 퍼지면서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일년 신수를 보이 『토정비결』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또한 『농아집(聾啞集)』을 저술하여 어진 자에게 전해주어 난을 구제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는 등 평생을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토정에 대한 기록은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이이(李珥)의 『석담일기(石潭日記)』, 조헌(趙憲)의 『중봉선생문집(重峰先生文集)』등에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그는 매우 괴이한 행색으로 도술을 배웠으며 마음이 바르고 곧았다 하는데, 이지함은 단순히 기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근심하고 구국제민 방도를 강구하여 학문을 닦고 고결한 품행으로 생애를 마쳤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특별히 전해지면서 그 행적이 신비화하는데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 당대 성리학의 대가인 조식(曺植)은 마포로 이지함을 찾아와 도연명에 비유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이이는 이지함의 죽음을 접하고 ‘지함은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며 형제간에 유무(有無)를 상통하고 자기 소유를 따로 하지 않으며, 재물을 가볍게 여겨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고 ......중략...... 모든 명령하는 일이 다 백성 사랑함을 위주로 하니 백성들이 사랑하고 사모하였다’고 극찬하면서 애도하였다

이외에도 당시 학문이 높고 뜻있는 인사들로 널리 알려진 성흔(成渾), 조헌(趙憲), 서기(徐起), 송익필(宋翼弼) 등과도 깊은 친교가 있고 그들로부터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방비책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상주하였으며 난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금산에서 7백의사와 함께 순절한 조헌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서 평상시에 자주 서로 찾아다니며 강학(講學) 토록 하였다. 조헌이 유배 중일 때 이지함이 죽자 유배에서 풀려나자 마자 조헌은 이지함의 묘소가 있는 충청도 보령(保寧)으로 가서 그를 애도하였다. 조헌이 보령으로 가는 도중 이지함을 생각하며 지은 시는 그가 얼마나 토정을 존경하였는가를 잘 나타내 준다

천리 먼길에 님을 만나 그 옛날 함께 논 것이
이 내 몸 종신토록 허물적게 하려 하시었소.

오늘 이 길 다시 오지만 님을 뵈올 수 없는 것이
이 세상 건질 큰 계책을 누구에게나 물어보나.

이지함은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고 벼슬도 현감에 머물렀으나 그의 학덕이 이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보은의 화엄서원(華嚴書院)에 제향되었다.

학식 덕행에 이름 높으신 분

신숙주(申叔舟)

마포동에는 세조 때의 고관으로 유명한 신숙주의 별장 담담정(淡淡亭)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권 3에 의하면 신숙주는 마포 북안에 담담정을 짓고 당대의 문장가인 강희맹(姜希孟).이극감(李克堪) 등과 시를 지으며 즐겼다고 한다.

신숙주(1417~1475)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보한재(保閑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그는 21세 때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으로 관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그 후 집현전 수찬을 지냈고 일본에 서장관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신숙주는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에 공이 많았는데 왕명으로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당시 유배 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으려 요동을 13차레나 다녀왔다. 그 후 집현전 응교와 사헌부 장령을 거쳐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1452년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서장관으로 추천되어 특별한 유대를 맺게 된 이래 계유정란 이후 더욱 돈독해졌다. 세조는 죽음에 즈음하여 “당태종에게는 위징(魏徵)이 있었고, 나에게는 숙주가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신숙주에 대한 총애를 표현하였다.

그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켰을 때 외직에 나가 있었으나 일찍이 밀모에 참가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그 후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의 호를 받고 고령군(高靈君)에 봉해졌다.

신숙주는 1459년 좌의정에 올랐는데, 이 무렵 동북방면에 야인의 침입이 잦아지게 되자 강경론을 주장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강원.함길도체찰사가 되어 야인정벌을 위해 출정하였다. 야인정벌시 그는 군사를 몇 개의 부대로 나누어 여러길로 한꺼번에 진격하는 전략을 펼쳐 야인의 소굴을 소탕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신숙주는 세조 때에 이어 성종 때에도 좌리(佐理)공신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임명되는 등 2대에 걸쳐서 고관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과거시험관을 13차례나 했고, 예조판서를 십수년, 병조판서를 여러 해 동안 각각 겸임하여 당대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했다. 성종대에 이르러 신숙주는 노병을 이유로 여러차례 사직하였으나 그때마다 그의 학문과 문장을 높이 평가한 성종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신숙주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관직생활 속에서도 줄어들지 않아 재직 당시에 많은 저서를 남겼다. 성종 3년에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을 편찬하였고, 이어서 『동국통감(東國通鑑)』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등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일본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 사선(私船)의 왕래 절차 등을 모두 기록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일본과의 교빙(交聘 :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使臣)을 보내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특히 그는 외교와 국방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문장에 능하여 당시 거의 모든 외교문서는 그의 윤색을 거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송설체에 뛰어난 신숙주의 필적으로는 「몽유도원도 찬문(夢遊桃源圖 贊文)」과 진당풍(秦唐風)의 고아한 느낌을 주는 해서체(楷書體)의 「화명사예겸시고(和明史倪謙時稿)」가 있다. 『보한재집』은 그의 7세손이 1644년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본 한질을 얻어 간행한 것이다.

박세채(朴世采)

박세채(1631-1695)는 조선 중기 때의 대표적인 학자로 30여권의 저서를 남기고 있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男溪)이며 가계는 고려말의 명문세족 충신인 박상충(朴尙衷)의 후손이다.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을 조부인 동량(東亮)이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박세당(朴世堂).박태보(朴泰輔) 등과도 혈족이 된다. 그는 이러한 가계와 척북에 따라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 하였는데, 그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왕조 500년 가운데 당쟁이 가장 치열하고 호란을 겪었던 격동기였으므로 그러한 대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 수난을 거듭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18세 때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2년만에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이이(李珥)와 성흔(成渾)의 문묘종사(文廟從祀)문제에 대해 왕에게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이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비답(批答)을 내리자 이에 분개하였던 것이다. 그 후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 학문을 배우고, 김장생(金長生)과는 사승(師繩)관계를 맺게 되었다.

1659년 박세채는 천거에 의해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으나 숙종이 즉위하자 관직을 박탈당하고 6년동안 양근.지평.원주.금곡 등지로 전전하며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은 박세채가 학문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기간 중 『독서기(讀書記)』를 비롯하여 『춘추보편(春秋輔編)』.『심학지결(心學至結)』등을 지었다.

1680년에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 집의를 거쳐 공조참판.대사헌.이조판서.우참찬 등을 역임하였으나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야인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때 박세채는『양명학변(陽明學辨)』,『천리양지설(天理良知設)』.『이학통록보집(理學通錄輔集)』.『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삼선생유서(三先生遺書)』.『신수자경편(新修自敬編)』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학문세계는 대외적으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는 중화적 천하인 명나라가 무너지고 오랑캐의 국가인 청나라가 호령하는 시기와 국내적으로 격화된 당쟁으로 탕평책을 요구하는 가운데 형성되었다. 이에 박세채는 정치적으로는 존주대의(尊周大義)의 입장과 탕평론을 취하였고, 예학을 중시하였다. 그는 특히 파당적 대립에 대해 “이대로 방치하면 붕당의 화는 반드시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데 이를 것이다”고 우려하며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가 죽자 숙종은 크게 애도하며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배향하였다. 박세채는 위의 저서 외에도 『제의정본(祭儀正本)』, 『백록규해(白鹿規解)』,『우계속집(牛溪續集)』을 비롯하여 많은 저서와 『문집』70권을 남기고 있다.

한백겸(韓百謙)

상암동은 실학의 선구자인 한백겸이 1608년 이후부터 자리를 잡고 살았던 곳이다. 원래 상암동은 수상리(水上里)와 휴암동(休岩洞)에 비롯되었으며 수상리는 수이촌(水伊村)이 변한 것이라 하는데, 한백겸은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에서 물위치(수이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한백겸이 상암동에 터전을 잡게 된 것은 동생 준겸(浚謙)이 이 곳의 북쪽 수리(數里)되는 곳에 농토를 가지고 살면서 이 마을 북쪽 산록의 밭을 형인 그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이곳에 살게 된 것이라 한다. 백겸은 물 좋고 산수 좋은 곳에서 만년을 보낼 생각을 하고 수이촌이라는 마을 이름을 물이촌(勿移村)으로 고치고 자신이 거처하는 집에 구암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이는 그 마을에서 옮겨가지 않고 오래 살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한백겸(1552~615)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서 본관은 청주이고 자는 명길(鳴吉)이며 호는 구암(久菴)이다. 그는 민순(閔純)에게 소학과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는데 의리에 관한 연구에 힘써 문경논맹(文經論孟)에도 정통했다.

1585년 교정청이 신설되자 교정낭청이 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맡아 보았다. 이듬해 천거로 중부 참봉이 되고 경기전(慶基殿)참봉을 거쳐 선릉(宣陵)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으나 임진왜란으로 풀려났으며 당시 적군에게 아부하여 난을 선동한 자를 참살한 공으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그 후 호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과 청주목사를 지냈다. 1607년 판결사를 역임하고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었으며 강원도 안무사를 거쳐 파주목사를 지냈다.

그는 역학에 밝아 선조 때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맡아 보았고 『동국지리』를 저술하여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동국지리지는 『전한서』의 조선전과 『후한서』고구려전·읍루전·삼한전 등에서 4군과 고구려의 여러 성, 백제국도, 신라소경지(新羅小京志), 고려제경(高麗諸京) 등에 관한 기사를 뽑고 간간히 필자의 의견을 붙여서 지은 역사지리책이다. 『동국지리지』는 한백겸의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1604년 아들 교흥(敎興)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물이촌의 원근풍경이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마을로 생각하고, 『물이촌구암기(勿移村久菴記)』에서 다음과 같이 극찬하였다.

앞에는 강 건너 여러 산으로 남계(南溪).관악.금주(衿州).소래(蘇萊)가 봉우리를 향하여 연접하여 둘러서 봉황이 춤을 추고 용이 공중으로 나는 듯 서로 창호간을 향하며, 왼쪽으로는 높은 세 봉우리(삼각산)가 1천길을 깎아 서서 위엄스러운 모습이 침범할 수 없는 형세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먼 포구와 메 뿌리가 한끝 아득하여 모든 것을 다 포용할 도량을 보이니 잠시간에 돌아보는 중에도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그리고 바로 문 앞에 마주서는 것을 선유봉이라 하는데 한 덩어리 외로운 산이 강 가운데로 날아 떨어진 듯, 여러 마리의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와도 같다. 그 주위를 둘러 보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소요정(逍遙亭)으로서 백척(百尺)이나 되는 두 기둥이 물 한 가운데에 마주 서서 마치 신선 사는 동부(洞府)가 문을 열어 놓은 것 같다. 그 밖에 높은 돛대 조각돛이 바람을 따라 오가며 여기저기에 보이다 말다 하니 들판 밖 큰 강가에서 언제나 구경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늙은 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6, 7마리씩 무리를 지어 혹은 물 마시고 혹은 누워 있으니 문밖의 푸른 풀은 언제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아침 연기 저녁 노을과 가을의 달, 봄의 꽃으로 그 경치가 때를 따라 무궁무진한데 모든 것을 다 눈 앞에서 거두어 간직하여 우리 집의 소유로 삼을 수 있다. 오직 후면만은 보이는 것이 없고 높은 벼랑과 끊어진 산록이 병풍을 두른 듯하여 북풍이 세차게 불어도 등을 내놓으면 따사롭다. 선유가 음양가(陰陽家)는 체사용삼(體四用三)이 이수를 논하여 ‘천지간에 동.서.남은 볼 수 있지만 북쪽은 볼 것이 아니다’라 하였는데 이곳이 참으로 천지 자연의 형세를 이룬 것인가.

도성에 가기 한 쉴 터도 다 못되고, 궁전의 풍경소리 때로 들려오니 조정 대신들도 촌사(村舍)를 짓고 전토(田土)를 구하는 데 이곳보다 편할 곳이 없을 것 같은데 오랜 동안 버려두어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마도 신이 깊이 깊이 감추어 두고 나를 기다린 것이 아닌가.

한백겸은 원주의 칠봉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동국지리지』외에도 『기전고(箕田考)』.『구암유고(久菴遺稿)』등이 있다.

기타

김자점(金自點)

성산동의 옛 고을인 풀무골은 반역죄로 처형된 김자점이 이곳에 풀무간을 차려놓고 병기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하고, 무이동(武夷洞) 뒤에 있는 「소식고개」는 김자점의 반란 계획 중 이 곳에 망보기를 세우고 서울 소식을 염탐하였다고 하여 얻어진 이름이라 한다. (주 : 한글학회, 『학국지명총람』1, 1966, 84면)

김자점(1588~1651)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이다.

그는 성혼(成渾)에게 수학하고 음보로 벼슬에 나아가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비논의에 반대하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이에 최명길(崔鳴吉).심기원(沈器遠).이귀(李貴) 등과 함께 반정을 모의하였고, 1623년에 군대를 모아 이귀·이괄(李适) 등과 함께 홍제원을 넘어 궁궐로 진격해 옴으로써 반정에 성공하여 정사(靖社)1등 공신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김자점은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하는 임무를 담당하면서 왕과의 유대관계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1737년 그는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체제를 바꾸는 등 노력하였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철저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에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절도에 유배를 당하였으나 인조의 도움으로 풀려나 강화부윤을 지냈고, 우의정에 올랐다.

그 후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고,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인조의 후의로 영의정에 오르고 효명(孝明)옹주를 손자 며느리로 맞게 되었다. 그러나 김자점은 이러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소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하였고, 세자빈 강씨에게 인조를 시해하고자 했다는 혐의를 씌워 사사시켰다. 또한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고,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임경업(林慶業)이 귀환되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1649년 효종의 즉위로 전횡을 일삼던 김자점은 탄핵을 받아 홍천에 유배당하게 되었다. 김자점은 효종을 제거하기 위해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효종이 청나라를 정벌하려 한다고 고발하고 명나라 연호가 기록된 장릉 시문(長陵 時文)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나라는 즉시 군사를 국경선에 배치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 진위 여부를 가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고발사건은 효종의 기민한 수습과 중신들의 활약으로 수습하게 되고 김자점은 다시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각지 수령과 지방 장수들과 내통하여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고자 했다는 김자점의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월산대군(月山大君)

합정동 457-1번지 한강동쪽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은 효녕대군의 별장이었는데, 성종 때 월산대군의 별장이 되면서 망원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세종왕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이곳에 나와 농사상황을 시찰하고 수전연습을 관람하였으며 성종 때도 이러한 관례는 계속되었다.

명나라 사신이 오면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써 유명한 망원정은 1925년 을축홍수의 피해와 연안도로공사 등으로 인해 훼손되어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망원정의 주인인 월산대군(1454-1488)은 성종의 형으로 이름은 정이고,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궁궐에서 자랐다. 7세 때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에는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년에 월산대군에 봉해지고 좌리공신 2등에 책봉되었는데 당시 최고의 권신이자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의 주선에 의해 세조비인 정희왕후가 월산대군의 동생인 제안대군(濟安大君)을 즉위케 한 것이었다.

이 때 성종은 한명회와 함께 이러한 조치에 대한 왕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갖고 있던 구성군 준(龜成君 浚)을 제거하고 권신들을 좌리공신에 책봉하였다. 이로 인해 월산대군은 왕위계승에 있어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신들의 농간에 의해 공신으로 책봉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으며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하며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이에 희우정을 개축한 망원정에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며 풍류적인 생활을 하다가 35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가 희우정을 망원정이라 이름 지은 것은 이 정자에 오르면 산수간 먼 경치를 잘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성품이 침착, 결백하고 산수를 좋아했다. 특히 월산대군은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문은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여러 편이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고, 저서로는 『풍월정집(風月亭集)』이 있다.

양령대군(讓寧大君)

하수동(下水洞) 강변 일대는 예전부터 절영지(絶影地)로서 많은 정자와 별장이 세워져 있었다. 서강의 북쪽 언덕에 있는 영복정도 많은 별장 중의 하나로 양령대군이 만년에 지은 것이다. 영복정이라는 이름은 세조가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세조가 이곳에 거동하였다가 영복정이라 이름짓고 친필로 현판을 써준 후 ‘영일세 복백년(榮一世 福百年)’이라고 그 뜻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양령대군(1394~1462)은 태종의 장남으로 이름은 시이고, 자는 후백(厚伯)이다. 그는 10세 때 오아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품을 가졌으므로 왕세자로서 지녀야 할 예의범절이나 딱딱한 유교적인 교육, 그리고 엄격한 궁중생활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보다는 남몰래 궁중을 벗어나 사냥을 하거나 풍류를 즐기는 것을 주로하였다. 이러한 양령대군의 품행은 태종의 눈에 걱정스럽게 비쳤음은 물론이고 엄격한 유학자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태종은 그에게 여러 차례 군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행을 닦을 것을 타이르고 때로는 심한 벌을 주기도 하였지만 양녕은 부왕의 요구에 이르지 못하였다.

1418년 류정현(柳廷顯) 등의 청원으로 양령은 세자위에서 폐위되고 왕세자의 자리는 훗날 세종이 된 충령대군(忠寧大君)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양령이 왜 그토록 파격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으며, 세자의 자리를 잃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자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세종과 극히 우애가 깊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과거에 왕세자였고, 현재 왕의 형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일거일동은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대신들에 의해 수십차례에 걸쳐 탄핵을 받았으나 그 때마다 세종이 각별히 배려하여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이러한 양령의 특이한 생애는 많은 후세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 그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양령대군은 특히 시와 글씨에 능하였다고 한다.

하수동(下水洞) 97번지에 있던 평초정(坪楚亭)은 구한말 당시 을사오적으로 일본에게 주권을 넘겨 준 박제순(朴濟純)의 99칸 저택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평초정은 6.25 동란 때 소실되었으며 현재 상수동사무소가 들어서 있다.

박제순(朴齊純)

박제순(1858~1916)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호는 평제(平濟)이며,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났다. 그는 25세 때인 1883년 문과에 급제한 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주사(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主事)·기연해방군사마(畿沿海防軍司馬)·주차천진종사관(駐箚天津從事官)·홍문관부교리·사헌부강장령·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886년에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에 돌아온 후에는 이조참의·성균관대사성·인천부사·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박제순이 1883년 호조참판으로 재직할 당시 동학교도들이 보은집회를 열자 청나라 군사의 파병을 위안스카이와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와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는데, 이 때 일본군 및 경군(京軍)과 연합하여 공주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참여하였다.

1895년 이후 외부협판을 비롯한 요직을 거쳤는데, 1899년에 조청(朝淸)통상조약과 1901년 조비(朝比)수호통상조약 등을 체결하였다. 1902년 주청전권대사(駐淸全權大使)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가 1904년 귀국한 후 이듬해에 외부대신으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와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을사오적의 한사람으로 규탄받았다. 그 뒤 의정대신이 되어 1907년에 이완용내각이 성립될 때까지 내각을 주도하였고, 이완용내각에서도 내부대신을 역임했으며 이완용이 저격당한 후에는 임시내각통리대신서리를 지내기도 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내부대신으로 한일합방조약에 서명하였으며, 그에 대한 댓가로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그 외에도 윤비의 백부인 윤덕영(尹德榮).민영기(閔泳綺) 등과 함께 교육의 진흥과 위생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관진방회(觀進坊會)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지냈으며 한동안은 유림의 태두로 대우받기도 하였다.

이하응(李昰應)

현재 염리동 150번지의 「동도중고등학교」는 흥성대원군의 별장인 아소당(我笑堂)으로 일명 공덕리 별장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곳으로 가는 길목에는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한 때 아소당은 흥선대원군이 세상을 떠난 후 산소를 썼다 하여 국태공원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는데 산소는 1907년에 파주 대덕리(大德里)로 옮겨졌다. 아소당은 1962년 철거되어 봉원사(奉元寺) 염불전을 짓는데 사용되었다.

이하응(1820~1899)의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영조의 현손인 남연군(南延君)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세 때 다시 아버지를 여읜 후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이하응은 24세 때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으나 세도권을 잡고 왕실과 종친을 대해 위협을 가했으므로 한직을 전전하던 그는 이를 피하기 위해 장안의 무뢰배들과 어울려 파락호 생활을 하거나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행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시정배들과 어울려 지내는 생활을 통해서 이하응은 서민생활을 체험할 수 있었으며 백성들의 여망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하응은 이렇게 시정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도 당시 궁궐 내 최고의 어른인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후일을 도모하였다. 즉 안동김씨에 원한을 품고 있던 조대비의 친조카 조성하(趙成夏)와 친교를 맺고 그를 통해 조대비에게 접근하여 후사가 없는 철종의 후계로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明福)을 지명하기로 묵계를 맺어두었던 것이다. 이윽고 1863년 12월 철종이 승하하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아들 명복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원로대신 정원용(鄭元容)의 발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통해 고종을 즉위시키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에 따라 이하응도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지고 대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세간에서는 그를 대원위(大院位)대감이라 불렀다.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공고히 하며 조선을 중흥할 과감한 혁신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으며 경복궁 중건의 대역사를 착수하였다. 그러나 경복궁의 중건을 비롯한 그의 개혁 조치는 많은 부작용과 함께 사림의 반발을 낳았고, 천주교도의 박해와 쇄국정책은 일시적으로는 구미열강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도발을 극복할 수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조선 근대화의 길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특히 그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자 영락한 가문에서 받아들인 민비가 도리어 고종의 친정을 단행케 함으로써 그 자신이 정계에서 쫓겨나는 비운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 후 대원군은 민비와 정치적 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아소당은 정계에서 축출된 대원군이 운현궁에서 유폐생활을 하던 중 1895년 손자 준용(埈鎔)의 역모사건으로 준용이 교동도(僑洞島)로 유배를 가게 되면서 그 자신이 머물게 된 곳이다. 어느날 이른 아침 대원군은 몰래 운현궁을 빠져 나와 준용을 따라가 고생을 같이 하고 싶은 마음에 마포나루로 나와 배를 탔으나 뒤늦게 나타난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를 당한 후 이 곳에 은폐되었던 것이다. 이 때 대원군은 자신이 거처하는 집 이름을 아소당이라 짓고 스스로 자신의 무상한 삶을 비웃었다. 대원군이 아소당에 기거할 때 지은 다음의 시는 이러한 그의 심경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내가 내몸 저바리니 책임 스스로 중한 것이
공직에서 물러난 나날을 술잔이나 기울이네.

지난일 생각하면 모두 다 꿈인 것이
어쩌다 남은 생애 세상 물정 따를거나.

산촌에 앉아 있으니 속된 말도 좋은 것이
시냇가 버들 그늘에 매미소리 들으며
시나 지어본다네.

이 내 인생 백년간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하나
전생도 이생도 내 스스로 웃을 일이네.

그러나 아소당에 은폐되어 있던 대원군은 다시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정계로 진출하면서 일시 아소당을 떠났다가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양주 곧은골로 돌아가 생애를 마치게 되었다. 1907년에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헌의(獻懿)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

망원동 137번지와 207-1번지 일대, 지금의 망원정 자리는 세종 때 효령대군이 별장을 짓고 귀족들과 함께 풍경을 즐기던 교외의 명소로 희우정(喜雨亭)이라 하였다. 1424년에 세워져 세종이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세종은 1425년에 서교에 나와 농정을 살피다가 이곳에 올랐는데, 때 마침 기다리던 비가 내려 들판을 흠뻑 적시니 왕이 이를 매우 기뻐하며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이라 지었던 것이다.

이 때 정자의 주인이었던 효령대군은 왕에게 감사하며 당시 서도(書道)로 이름 높던 부제학 신색(申穡)에게 부탁하여 글씨를 받아 현판을 달았고, 시문의 대가였던 변계량(卞季良)에게 「희우정기(喜雨亭記)」를 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정자는 강변에 가까운 언덕에 있었고 주위에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하여 이 부근은 명승지뿐만 아니라 수군과 육군의 훈련장으로도 사용되었다.

효령대군(1396~1486)은 태종의 둘째아들로 이름은 보(補), 자는 선숙(善叔)이다.

20세 때 대군으로 봉해졌는데, 독서를 즐기고 활쏘기에 능해 항상 태종을 따라 사냥터에 다녔으며 특히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인 태종이 병에 걸리자 밤을 세워 간호하고 손수 시탕을 돌보았다. 또한 동생 세종과 우애가 깊어 왕이 자기 집에 들리면 밤이 깊도록 국사를 의논하였다. 세조와의 친분 또한 두터워 효령대군이 궁궐에 다녀 나올 때는 세조가 친히 등촉을 밝혀 들고 배웅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에 독실한 효령대군 수많은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론하게 하였으며 1464년 원각사(圓覺寺)가 창건되자 조성도감제조가 되어 역사를 친히 감독했다. 불교에 대한 효령의 애정은 이에 그치지 않아 『원각경(圓覺經)』을 국역으로 국역하여 간행하였다. 만년에는 좁은 별실을 만들어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기거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

출처 : 마포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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