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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설화 (傳說/說話)

도화동(挑花洞)과 도화낭자

도화동은 복사나무가 많고 봄철이 되면 복사꽃이 피어 경치가 좋았으므로 「복사골」이라 부르던 데에서 유래된 동명(洞名)이다.

옛날 우리나라는 봄철이 되면 진달래, 개나리꽃과 함께 살구꽃이 유명하였다. 특히 복사꽃은 살구꽃과 함께 유실수의 꽃이기 때문에 집 주위에 많이 심어서 친근한 꽃이 되었다. 따라서 거의 마을마다 집마다 복사·살구꽃이 인가 주위에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봄철이 되면 그 복사꽃에서 풍겨나는 향기,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사람의 정신을 황홀하게까지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복사꽃이 많은 마을을 흔히 도화동이라 부르고 또 상춘객들의 유상(遊賞)하는 장소가 되어 유명해졌는데, 고대소설 심청전에 나오는 황주 도화동(黃州 挑花洞)은 널리 알려진 것이며, 서울지역에도 마포 도화동 외에 다시 북악 아래의 도화동, 혜화문 밖의 도화동 등을 볼 수 있다.

북악 아래 있는 도화동의 풍경에 대하여는 정조조의 문인 유득공(柳得恭)의 아래와 같은 시에서도 볼 수 있다.

바람불고 비오니 시냇물 불어나는 것이
이 봄이 가기전에 도화동 구경가세나

동중의 복사나무 천 그루나 되는데,
사람은 나비따라 가고 나비는 사람따라 오네.

모두 도화동의 옛날 승경 승사(勝事)를 잘 말하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도화동은 산하곡한(山下谷閑)에 위치한 도화동이었지만 마포의 도화동은 산을 등지고 강에 임한 도화동으로서 그 경치는 좀 호화롭고 바람을 따라 나는 꽃과 향기는 좀더 멀리 퍼졌을 것이니 이곳 도화동의 풍경은 특별히 색다른 바가 있었을 것이다.

이 도화동의 동명을 가져오게 한 복사골은 지금도 도화제1동 경사진 곳에 마을 이름을 남겨 전하는데, 여기에는 또 다음과 같은 전설이 함께 남아 다시금 그 옛날 이곳의 도화풍경의 신비경을 상상하게 된다.

아득한 옛날 옛적, 이곳 복사골에는 마음씨 착한 김성(金姓)의 노인이 아름다운 무남독녀 도화낭자(挑花娘子)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도화낭자의 아리따운 모습과 마음씨는 천궁(天宮)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옥황상제의 며느리로 하늘에 올라가게 되었다.

김노인은 딸이 천궁으로 출가하는 것이 기쁘기는 하지만 외딸을 영영 이별하게 되니 서운한 마음이 이를 데 없었다. 김노인은 그 선관이 주고 간 씨를 집 근처에 심고 얼마 후에 복사나무가 자라 꽃이 피는 것을 즐겁게 구경하며 지냈다. 그리고 김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복사나무는 번성하고 마을 사람들 또한 김노인과 도화낭자를 생각하며 복사나무를 많이 심어 일대가 모두 복사꽃밭을 이루기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이적(神異的)인 전설, 선경을 방불케 하는 도화풍경(挑花風景)과 함께 이 복사골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도화동으로 부르게 된 것은 퍽 오랜 옛날부터의 일로 고종조 초기에 편찬된 육전조례(六典條例)에 의하면 서부 용산방(龍山坊)에 도화동(挑花洞)의 내계(內契), 외계(外契)가 갈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구역이 넓기 때문에 동을 내동·외동으로 함은 물론 계도 내동계·외동계로 갈라 편성하였던 것이다.

염리동의 유래와 개운사(開運寺)

염리동은 행정동명과 법정동명이 일치하는데 동명이 붙게 된 유래는 옛부터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불리어지게 되었다 한다. 현재는 없어졌지만 대흥동의 동막역(東幕驛) 부근에 소금창고가 있었으며 마포나루(삼개)에서 소금배가 그곳까지 들어 왔다고 한다.

마포는 옛부터 「염전머릿골」이 있어서 이 곳에는 소금배가 드나들어 소금전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한성부(漢城府) 시전에 삼대시《 三大市 : 종가, 이현(梨峴)·남문》가 있는데 그 상품중에 마포염이 명시되어 있는것을 보아도 마포가 소금을 서울에 공급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고, 얼마전까지만 해도 마포하면 소금과 새우젓 집산지로 유명하였으므로 염리동의 명칭은 우연한 이유에서 유래된 것은 아닐 것이다. 개운사와 관련된 이야기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조선 인조 15년 가을
한 척의 배가 삼개에 닿아 있는데 그 배 가운데에는 사람은 없고 다만 경함(經函)만 들어 있는데 그 함안에는 중원개운사간(中元開運寺刊)이란 6글자가 씌어 있었다.

삼개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이것을 관에 보냈더니 왕이 보시고 이르기를 「임자없는 배가 삼개에 표착한 것은 참으로 영괴(靈怪)하다. 이 경문은 중원의 개운사에 일찍이 나타난 일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 이같은 이름의 절이 있으면 짐은 그 절에 이것을 주어서 오래도록 호장(護臟)케 할 것이다.」라고 분부하시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개운사라는 이름의 절이 광주 나한산성 동문안에 있었으므로 왕은 경함(經函)을 금련십습(金練十襲)으로 잘 짜서 친히 신하를 보내어 절에 간직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뒤 숙종 20년 겨울 그 절에 불이 나서 그 경함을 간직해 둔 누각에 불길이 타오르려고 했을때, 갑자기 큰 비가 퍼부어 불을 껐으므로 누각속에 간직한 물건은 그 때문에 하나도 손실된 것이 없었다고 한다.

토정동(土亭洞)의 유래

마포 강변 마포동의 서쪽, 용강동의 동남쪽에 토정동이 있다. 마포동과 함께 바로 넓은 강변에 임하여 풍경도 좋고 강상(江上)을 통한 물자의 수출입도 많던 곳이다.

헌종조(憲宗朝)의 저술인「경조부지(京兆府誌)」, 고종조의「육전조례(六典條例)」등 옛날 문헌에도 서부 용산방(西部龍山坊)의 토정리계(土亭里契)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부근은 옛날부터 「토정마을」 즉, 토정동·토정리 등으로 부르고 기사(記寫)되어 왔음을 볼 수 있다.

이 토정동의 명칭은 명종(明宗) 선조조(宣祖朝)의 문인이요 기사이던 토정 이지함(李之函)의 거주지였던 데서 유래된 것이라 하며 해방후에도 마포 유수지가에 토정선생 옛 집터로 전해지는 빈터가 남아 있었고 또 멀지 않은 곳에는 「윗토정」으로 불리어지던 마을도 있었다. 그렇다면 토정의 동명, 지명은 일찍이 400년전 토정이 세상을 떠나기 전후한 시기부터 일반인들에 의하여 불리워지던 마을 이름, 땅 이름임을 알 수 있는 일이다.

토정 이지함의 인물과 그가 이곳에 거처하던 사실에 대하여 선조조의 문인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지함은 지번의 아우인데, 역시 기이한 선비로서 베옷, 짚신에 삿갓을 쓰고 다녔다. 가다가는 사대부들과도 함께 노는데 태도와 언행이 방약문인하였으며 제가의 각종 술법을 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한 조각 배를 타고 네 귀퉁이에 큰 바가지를 달고 세 번이나 제주에 들어갔는데도 풍파의 환란이 없었다. 몸소 장사를 하여 민중들에게 실리를 가르치며, 맨손으로 생업을 하여 수년내에 양곡 수만섬을 쌓아 놓고는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해도(海島)로 들어가서 박을 심어 박 수만개를 거두고 그것을 타서 바가지를 만들어, 양곡 몇 천섬을 팔아 경강의 마포로 운반해 오고 강촌사람들을 모집해서 흙을 쌓고 안을 발라 높이 백척이나 되는 토실을 만들어 이름을 「토정」이라 하며 그 곳에 양곡을 쌓고 토실 위에서 거처하였다.

여기에 보면 토정은 매우 괴이한 행색으로 도술이 많아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구전하여 오기도 한다. 또 지금도 1년의 신수를 보는 점서 토정비결(土亭秘訣)이 널리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기행하는 기적의 사람으로 알려졌던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이토정은 다만 그러한 기행괴술(奇行怪術)의 사람이라기보다 나라를 근심하고 구국제민(救國齊民)의 방도를 강구하며 학문을 닦고 착한 일을 권장하던 큰 선비였다. 다만 그가 탐내지 않고, 고결 우선 당시의 우국경세가(憂國經世家)로서 이토정의 깊은 추허를 받기도 했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아래와 같은 기록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산현감(牙山縣監) 이지함이 죽었다. 지함은 소년시절부터 욕심이 적어 물건에 대해서는 아끼는 것이 없었다. 타고난 기질이 보통사람과 달라 능히 한서기갈(寒暑飢渴)을 참고 견디는데 어떤 때는 종일토록 알몸으로 열풍중에 앉아 있고, 10일씩이나 음식을 들지 않고도 병이 나지 않았다.

천성이 효도하고 우애하며 형제간에 유무를 상통하고 자기 소유를 따로하지 않으며, 재물을 경히 여겨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의 급하고 어려운 일을 구제해 준다. 세상의 변화와 여색에 담담하여 아랑곳하지 않으며,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기를 좋아하는데 위태로운 파도를 만나도 놀라지 않았다. 하루는 표연히 제주에 들어갔는데 목사가 그의 명성을 듣고 환영하여 객관에 머물게 하며 아름다운 기생을 뽑아 잠자리를 같이하게 하는데, 창고의 곡식을 가리키며 기생에게 말하기를 「네가 만일 이 사람을 잘 모시면 한 곡간의 양곡으로 상 주리라」하였다. 기생이 그의 위인을 이상히 생각하며, 그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 결심하였다. 밤이 되어 온갖 아양을 부리며 유혹하였지만 토정(土亭)은 날이 밝도록 끄덕하지 않으니 목사가 한층 더 경중(輕重)하였다.

소년시절에는 학문에 힘쓰지 않았는데 장성하여 그의 형 지번(之蕃)이 글읽기를 권고하니 그제는 발분근학(發憤勤學)하여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는데 얼마 안가서 글뜻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 볼 생각을 하지 않으며, 구속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대로 하는 생활을 좋아하였다.

「이이」와는 일찍부터 잘 아는 사이였는데 「이이」가 성리학에 종사하기를 권하니 지함이 「나는 욕심이 많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이가 「세리방화(勢利芳華)와 성색재리(聲色財利)가 모두 어른께서 탐탁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아닌데 무슨 욕심이 있어 학문에 방해가 되겠습니까」하니, 지함이 「하필 병리 성색만이 물욕이 되겠는가? 마음의 향하는 바가 천리가 아니면 모두 인욕이다. 나는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바르고 곧게 단속하지를 못하니 이 어찌 물욕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이때 아산 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친한 이들이 부임하기를 권거하였다. 지함이 홀연히 부임하여 백성들의 고통되는 일을 물으니 양어지를 들어 말하는 이가 있었다. 대개 읍에는 양어지가 있는데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고기를 잡아 바치게 하여 매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지함이 이에 그 못을 메워 후환을 영영 없이 하였다.

모든 명령하는 일이 다 백성을 사랑함을 위주로 하니 백성들이 사랑하고 사모하였는데, 갑자기 이질에 걸려 얼마 안되어 죽으니 나이 62세였다. 고을 백성들이 슬퍼하기를 친척같이 하였다.

이토정을 잘 알던 대학자요 정치가인 율곡 이외에도 당시의 학문높고 뜻 있는 인사들로 널리 알려진 우계 성혼(牛溪 成渾), 중봉 조헌(重峰 趙憲), 고청 서기(孤靑 徐起),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등과도 깊은 친교가 있고 또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그 방비책을 누차 상언(上言)하였으며 난이 일어남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전하다가 부산에서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순절한 중봉 조헌(重峰 趙憲)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서 자주 서로 찾아다니며 강학토론하였지만 토정이 세상을 떠난 후, 유배중에서 풀려난 중봉은 곧 충청도 보령으로 가서 토정의 신위앞에 곡제하며 그 죽음을 슬퍼하였는데 보령으로 가는 도중에 토정선생을 생각하며 지은 아래와 같은 시는 중봉이 얼마나 토정을 존경하고 신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천리 먼길에 님을 만나 그 옛날 함께 놀은 것이,
이 내 몸 종신토록 허물적게 하려 하시었소.

오늘 이 길 다시 오지만 님을 뵈올 수 없는 것이,
이 세상 건질 큰 계책을 누가 올릴고.

이렇게 당대 명사들의 추허(推許)와 존경을 받았으며, 또 서민들과 같이 생활하고 서민들을 돌보아 주던 이토정(李土亭)이었던 만큼 그의 생애와 사실은 서민들에 의하여 확대되고 미화(美化) 신비화되었던 것이다. 위에서 보인 어우야담 중 "야담" 또한 이토정의 사실을 좀 더 확대 신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만리현 변전(邊戰)

삼문 밖과 아현 사람들이 성군분대(成群分隊)하여 몽치를 가지고 혹 돌을 던지며 함성을 지르면서 서로 급히 쫓아, 만리현위에서 접전하는 형상을 하는데 이를 「변전(邊戰)」이라 하며 퇴각하여 달아나는 편은 졌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말은 삼문 밖이 이기면 기내(畿內)가 풍년들고, 아현이 이기면 제도(諸道)가 풍년든다고 한다.

용산, 마포의 소년(少年)들은 무리지어 아현을 구원한다. 한창 싸울 때는 외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여 머리를 싸매고 서로 공격하여 이마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 피가 흘러도 그치지 않으며, 사상하여도 뉘우치지 않고 또 목숨을 대신 갚는 법도 없으니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하여 서둘러 피해간다. 법금(法禁)을 맡은 관청에서 특별히 금지하지만 고질(痼疾)이 된 습속을 아주 없이 할 길이 없다. 성내 아이들도 이것을 본받아 종로 비파정 등지에서 하며, 성 밖에는 만리현과 양수현이 편싸움을 하는 곳이 된다.

특히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남대문밖(三門)사람들이 이기면 경기, 즉 서울부근이 풍년들고 아현사람들이 이기면 8도가 풍년드는 것으로 전하여 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 아현이 경기외의 8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왔다는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편싸움은 양편으로 두패가 나누어 싸운다고 하여 '편싸움'으로 부르고 변전(便戰, 邊戰)으로 기록한 것인데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평양의 석전이나 황해도의 햇불싸움등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그 기원은 우리나라의 상무정신(尙武精神)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세에 와서 고종3년(1866), 미국상선 숴맨호가 대동강상에 들어와 무리한 요구와 행동을 하여 소요가 일어났을 때 평양의 유명한 돌팔매꾼이 그 공격에 등장하였던 것이나 갑신정변때 일본공사 일행이 성내를 탈출하여 서대문을 나와 마포를 향해 달아날 때 곳곳에서 돌맹이가 날아들었던 것도 그러한 석전, 변전의 여풍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석전은 고개나 강을 경계로 하여 마을과 마을 또는 동과 서, 남과 북등으로 편을 갈라 돌로 싸우는 가장 남성적인 민속놀이로 "돌싸움" 또는 "편싸움"이라고도 한다.

서울에서는 보름날 저녁 아현(阿峴)사람들과 삼문(동대문, 서대문, 남대문)밖의 사람들이 만리동(萬里洞)고개에서 석전을 행하였다. 아현쪽에서는 용산, 마포의 불량소년들까지 가세하였다. 여기서 아주 격렬한 편싸움이 벌어져 그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으며 이마가 터지고 팔이 부러지는 부상자가 속출하여도 그치지를 않았다. 또 삼문에서도 아이들이 만리동 고개의 석전을 모방하여 종가(鍾街, 현 종각근처)와 비파정(琵琶亭, 관수동근>석전은 돌을 던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수진도 하며 부상자가 많이 발생하고 심지어 죽는 일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석전이 전쟁을 방불하는 전통적인 민속놀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또 석전은 위험을 내포한 과격한 싸움이지만 용감한 정신을 함양하고 집단적으로 공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전(實戰)을 대비한 훈련의 성격도 지닌 민속놀이이다.

석전의 기원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구려때 국왕이 관전하였다는 기록이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바 우리 민족은 일찍부터 이 놀이를 즐겨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사(高慮史)」,「이조실록(李朝實錄)」을 비롯하여 「패관잡기(稗官雜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경도잡지(京都雜誌)」등 많은 문헌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오랜 역사를 거치는 동안에도 석전은 민중의 연중행사로서 널리 행하여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석전은 가장 남성적이고 전투적이라는 특징뿐만 아니라 민간신앙적인 성격도 함께 지니고 있다. 만리동 고개 석전의 경우 삼문밖 사람들이 이기면 경기도가 풍년이 들고 아현사람들이 이기면 다른 도(道)에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석전의 승부에 따라 풍년과 흉년을 미리 알 수 있는 점복(占卜)적인 요소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주술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신수동(新水洞)의 유래

신수동이 한성부에 처음 편입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영조 27년(1751)에 수책성자(守冊城字) 「도성삼군분계총록(都城三軍分界總錄)」에 서부 서강방(西江坊-성외) 신수철리계(新水鐵里契)라고 나타났으며, 「수선전도(首善全圖)」에는 수철리(水鐵里)라고 기록하였다. 신수동의 동명유래는 확실치는 않으나 이 곳에서 오래 살던 이에 의하여 신수동의 원래 이름은 수철리에서 기원했는데 「수철」이란 이름은 신수동 110번지와 109번지 일대를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 불렀기 때문에 수철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무쇠막」은 옛부터 정부에 무쇠솥 농기구를 만들어 바치던 공장이 많이 있었으므로 생긴 마을 이름이다. 또 솥을 만드는 바탕을 설치해서 무쇠를 녹여 부었기 때문에 「바탕거리」라고 부르는 곳 110번지 1호에는 집을 지을 때에도 기초공사에서 쇳조각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50번지 일대를 「메주 무수막」이라고 불렀는데 이 곳은 옛날부터 정부에서 쓰는 메주를 쑤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옆동네에는 아가위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아가 나뭇골」 또는 「아기 나무골」이라고도 부르는 동네가 있었다. 이 동네 위쪽 현재 성결교회 아래쪽 202번지 3호에는 「장사바위」가 있었다.

이런 이름이 붙게 된 까닭은 이 동네에 살았던 장사가 이 바위에 올라갔는데 그때 손톱자국과 발톱자국이 파여져 흔적이 남았고, 이 바위에 소변을 보았더니 구멍이 뚫어져 버렸는데 일제때 장사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왜인들이 그 구멍에 정을 박고 쇳물을 끓여 부어 넣게 함으로써 장사의 혈을 끊어 놓았다 한다. 또 이 곳 노인들이 어렸을 때 이 구멍에다 연줄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사금파리를 넣어 찧어서 곱게 만들고 다시 풀을 섞어 연줄에 발랐던 일도 있었다 한다.

아현동(阿峴洞)의 유래

아현(阿峴)계 동명(洞名)은 육전조례(六典條例)등 고종조(高宗朝)때 많이 보이는데, 그 중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때 종래 한성5부의 부(部)로 고칠 때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한성의 동·남·중·서·북의 5서중 서서반송방(西署 盤松坊)과 북서 연희방(北署 延禧坊)으로 아현의 여러 동명(洞名), 계명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즉 서부 반송방(西部 盤松坊)과 북부 연희방(北部 延禧坊)에 있는 계·동명 중 아현명칭의 계가 5, 동이 4개소가 있는데 그것은 안산(鞍山)의 남쪽으로 뻗어나간 줄기 즉 지금의 아현동 고개마루를 중심으로 한 북쪽의 대현(大峴), 남쪽의 만리현(萬里峴)사이의 지역을 아현으로 통칭하던 데에서 연유된 것으로 보여진다.

동중(洞中)에는 흔히 「애우개」로 불리어지는 아현의 고개마루는 물론 굴레방다리, 오부수마을, 큰 행화동, 작은 행화동, 행화교(杏花橋), 너럭바위, 너럭바위샘등의 지명(地名)이 남아 전함을 볼 수 있다.

남쪽에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大峴)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이 고개가 작기 때문에 「애고개」 즉 아현(阿峴)으로 부르던 것이 「兒」가「阿」로 변하여 아현이 되고 그 고개 이름 아현이 그대로 동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옛날 한성부에서 서소문을 통하여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으며, 지금 아현동 산7번지 일대에 많이 있는 아총(兒塚)이 그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하며, 풍수설과 주산(主山)을 부아악(負兒岳)이라 하는데 그 아이가 달아날 의사가 있으므로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母岳), 남쪽의 산을 벌아봉(伐兒봉), 모악에서 서남쪽의 산을 병시현(餠市峴)이라 이름지어 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 중 벌아봉은 아기를 못나가게 막는 의미요 병시현은 떡으로 달래어 머무르게 하는 의미인데, 그 병시현이 곧 아기를 달래는 고개 아현이었다는 것이다.

또 견한잡록(遣閑雜錄 : 선조조 문인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리 지방 기로(耆老)의 모임이 둘이 있다. 하나는 아이현(兒耳峴)의 여러 늙은이(고개 아래 거주하는 이들)들이 경진년(선조 13년, 1580) 가을부터 모임을 가지다가 임진년 여름에 와서 난리를 만나 흩어졌는데 매달 각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가지며 활쏘기를 하고 혹은 바둑두고 시를 지으며 즐겼다.

처음에는 20인이었는데 나중에는 9인이 되었다. … 중략 … 하나는 만리현의 여러늙은이(고개아래 거주하는 이들)들이 임진년(선조 15년)봄부터 모임을 갖다가 임진년 여름에 난리를 만나 흩어졌는데 매달 돌아가며 모여 활쏘고 바둑두며 시 짓는 것이 아현과 같았다.

※ 아이현(阿耳峴), 아현(阿峴)은 우리말의 "아이고개" "애고개"를 한자로 옭겨 쓴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아현(阿峴)이 작은 고개를 의미하는 "아기고개" 아이고개"에서 유래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민담/야화 (民譚/野話)

박석거리

옛날 이곳(신수동)에 영감님 내외분과 아들 며느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아들은 기운이 장사였다고 한다. 어느 날 영감님 내외분은 노들(노량진)에서 있는 굿구경을 떠나고 며느리 혼자 집을 보고 있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가 아내 얼굴을 보니, 굿구경을 가지 못한 서운한 낯빛을 알아 차릴수가 있었다. 그래서, 장사는 아내에게 슬쩍 이렇게 물었다. "당신 굿구경을 보고 싶지 않소?" "보고는 싶지만 어떻게 갈수가 있어야지요?"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장사 남편은 "그럼 내가 구경을 시켜줄테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오?" 이 조건에 아내는 순순히 응락하였다.

장사는 아내의 눈을 가리기 위해 행주치마를 머리에 뒤집어 쓰게한 뒤 절대로 허락없이 벗지 않도록 당부하고 자기 손바닥에 아내의 두 발을 올려 놓도록 하였다. 아내가 손바닥에 두 발을 올려놓자 갑자기 공중으로 뜨는가 하더니 귓가에 바람이 윙윙 부는 것이 굉장히 빠르게 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그런 일이 있었나 싶더니 땅 위에 내려 놓는것같이 생각되었다. 이어서 남편이 행주치마를 벗게하자 주위를 살펴보니 자기집은 아니고 노들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눈이 똥그레 어리둥절한 아내를 장사남편이 데리고 굿구경을 시켜주었다.

다시 저녁때가 되자 아버지 어머니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야 하는 까닭에 장사남편은 아내를 다시 데리고 올 때와 같은 방법으로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아내는 보고 싶던 굿구경을 어른들 모르게 감쪽같이 갔다 온 생각을 하니 참으로 자기 남편이 고맙고 신비한 힘을 지닌 것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요술을 부리는 사람이나 괴상한 힘을 가진 사람은 관가에서 처형하던 때인데 젊은 아내의 입을 통해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소문이 퍼져나가자 드디어 장사는 관가에 붙잡혀 죽게 되었다. 늙은 부모와 아내는 땅을 치고 발을 굴렀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장사가 처형된 날 밤 이 곳 박석고개에는 큰 용마가 땅속에서 나타나 크게 울며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용마가 장사의 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에 용마는 장사의 변신이라고 하며 이때 용마의 발굽에 큰 바위들이 부서져 박석이 되었다 하여 이 「박석고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 이 이야기는 신수동 전설인데 신수동사무소 뒤편 310번지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박석거리는 잔돌이 많이 깔려 있어서 유래된 이름이다. 땅이 질어서 잔돌을 많이 깔아 놓은 것 때문에 이름이 생겼다고도 하며 해주에서 들여온 돌로 구들장을 이 곳에서 많이 만들어 냈는데 이 구들장을 만들고 남은 돌조각들을 이 고갯

와우산

당인리(서울화력)발전소 동북쪽에 높이 105m 되는 산이 있는데 이를 와우산(臥牛山)이라 한다. 이 산이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자리잡고 있어서 멀리서 바라다 보면 마치 소가 꿇어 앉아 있는 모양과 같으므로 와우산이라고 부른다. 지금 와우산 기슭은 창전, 상수(上水)로 나누어져서 주택지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지만 와우산 동편 기슭 창전동에는 일찍이 조선 초기부터 광흥창이라는 큰 창고가 있었다. 이 곳 광흥창은 황해·평안·전라·충청등 여러 도와 경기연안에서 들어오는 공미(貢米)를 모아서 쌓아두던 곳이었다.

또, 「굴레방다리」와 「와우산」에 대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예전에 큰 소가 있었는 데 길마는 모악산에다 벗어 놓고, 굴레는 북아현동 163번지 남쪽 네거리에 벗은 다음 서강을 향하여 내려가다가 와우산에 가서 누웠다. 그 까닭으로 북아현동 네거리에 있는 다리를 굴레방다리 또는 륵교(勒橋)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육전조례 호전편(六典條例 戶典篇)에 의하면 광흥창은 호조에 속해 있다고 하며 모든 관원의 녹봉(祿俸)을 관장한다.

-중략(中略)- 매월 20일후에 이조, 병조에서 작성하는 봉급조서의 성안(成案)을 기다려 감봉 및 물품관리관의 귀책사유의 해제 여부를 고찰하여 광흥창에 통지한 다음 날짜를 배정하여 지급한다.

왕십리와 마포 사람 : 구전(口傳)

조선시대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을 왕십리 미나리 장수라 하였고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을 마포 새우젓 장수라 하였는데, 그 이유는 왕십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미나리를 팔러 오려면 아침 햇빛을 등 뒤에 두고 오기 때문에 목덜미가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고, 마포에서는 아침에 도성안으로 새우젓을 팔러 오려면 아침 햇빛을 앞으로 안고 오기 때문에 얼굴이 햇빛에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다.

※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왕십리나 마포에는 미나리나 새우젓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포는 단순히 생선이나 새우젓을 파는 어촌이 아니라 전국의 선박들이 모여드는 강항(江港)으로서 일찍부터 번성했다.

쌍용대

쌍용대는 두 개의 용머리 모양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이 일대는 1969년경 택지조성을 하는 바람에 주택들이 들어섰고, 개바위는 「(太岩)」는 쌍용산 남쪽 끝에 공덕동과 경계가 되는 염리동 27번지 96호 부근에 있었다 하는데 이상한 전설이 있다.

조선 철종때(哲宗) 이 곳에 살던 큰 부자가 개를 수십년 길렀는데 어느날 그 개가 집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으므로 찾아나섰다. 그런데, 개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쌍용산」남쪽에 전에 없던 개 모양(3m)의 바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는 이 마을에 도둑이 없어지고 평화스런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전만해도 매년 음력 7월 1일에는 개가 입을 벌린 모양에다 음식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 무당(巫堂)들이 있었으며, 이 바위를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셨다고 한다.

염리동 물장수

일제 강점기때 일이다. 염리동 지역에 우물을 파면 우물에 간기(짠기운)가 있어서 주민들은 식수에 고충이 많았다.

현재 염리동사무소 부근에 「보름물께」라는 동네가 있었다.

보름물께 우물이 보름동안은 물맛이 짜다가, 다시 보름동안은 물맛이 달기 때문에 붙여진 동네이름인데 그 지역의 우물이 대체로 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민들은 물을 사서 먹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물장수들이 물지게로 물을 날라 주었다. 물값은 돈으로 지불했고 주로 월부제로 주었다.

물장수들이 새벽에 물을 지고 오면, 주민들은 집집이 윤번제로 돌아가며 물장수들에게 아침밥을 제공했다. 새벽부터 물을 져날라 허기진 물장수들이 밥을 어찌나 싹쓸이하여 잘먹었던지 식성이 좋은 사람들을 일러 「물장사 상먹듯 한다」는 속어가 유행했다.

장사 고각보와 장사 초립동이

지금의 대흥동(大興洞)에 옛날에 고각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힘이 장사인데 조랑말을 끌고 동소문으로 해서 원산(元山)으로 다니며 북어를 실어다 파는게 직업이었다.

그때는 한 사람이 말을 끌고 원산까지 갔다가 북어를 싣고 오고 그러는데 이 사람이 어찌나 심술이 궂고 불량을 폈던지 동소문밖에서 원산까지 오백리길에 고각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그래서 마방집에서는 고각보가 올만한 날짜에 말 방을 따로 해놓고 깨끗이 청소를 해 놔야 했다. 그런데, 하루는 웬 초립동이가 말 두 마리를 끌고 들어오더니 고각보의 마방에다 말을 떠억 매니, 주인 마누라가 있다가 "저것 또 왜 저기 말을 매나" "거기 매지 말고 다른데 매시요" 하니까. "나도 말죽 사 맥이고 밥 사 먹고 그러는데 마방이 깨끗해서 매는데 왜 딴데다 매라고 하오?"하였다.

"거기에다 말을 매는 사람은 따로 있고 거기 맸다가는 좋지 않으니 딴데 매시요."라고 주인 마누라가 다시 말리면서

"이만 저만한 고각보라는 사람이 올텐데 그 사람은 힘이 장사고 아주 심술이 구진이인데 해 질 무렵에 여기 들어올꺼요. 그러니 말을 딴데 매시오."

그러니까 젊은 초립동이가

"나는 손님이 아니냐" "왜 딴곳에 매라고 그러느냐?"고 영 옮겨 매지 않았다. 주인 마누라가 아무리 말해도 안들으니까 괘씸해서 "이따 혼좀 나보라"고 가만 두었다고 한다.

해질 무렵이 되니까 고각보가 말 두 마리를 끌고 들어와 마구간에다 말을 매려다가 "누가 어떤 놈이 여기다 말을 맸냐"고 호통을 치더니 물어도 안보고 허리에 찬 장두칼로 고삐를 끊고 딱딱 때려서 말을 내쫓았다고 한다. 초립동이는 제 말고삐가 끊어져서 내쫓기니깐 아무말도 않고 밖으로 가서 자기말을 붙들어다가 다른 데다 맸다. 아무말도 안하는데 시비할 것도 없지.

그 시절엔 신발이란 짚세기를 신고 다닐때니깐 감발을 하고 다녔다. 감발을 하면 저녁에 마방집에 들어가서 감발을 끌러 자기가 빨아야 했다. 누가 빨아줄 사람이 없으니까. 빨으면 이것을 부뚜막위에 넌다. 부뚜막이 뜨거우니까, 새벽에 마빨려고 대야에 물을 담으러 부엌에 들어가니깐 초립동이가 말죽 끓이는 불을 때는데, 물거리 나무를 때고 있었다. 물거리는 무얼 물거리라고 하는고 하면 시골산에 잡목, 싸리, 머 이런 나무를 베리를 똑똑 잡아당겨서 끊어서 아궁이에다가 넣는 것이었다. "스으 요놈 대단하구나" "도구대같은데 웬 힘이 이렇게 많은가"하구 그 집 뒤로 돌아가서 물거리 나무를 잡아당겨서 끊을라고 해도 안 끊어지자, 큰일났다고 생각했다.

말 고삐를 칼로 잘라 버렸는데, 만약에 저놈이 나하고 힘을 겨루자하면 꼼짝없이 맞어죽겠다고 걱정하고, 맞아죽을 것을 예방하느라고 연구해 가지고 다시 부엌에 들어가 보니깐 말죽이 한참 끓고 있었다. 말죽이 끓어서 벌레덕벌레덕 하면 이걸 저어야 하기에 초립동이가 고물개를 가지고 이걸 젓고 있어서 "아 그 고물개로 젓고 있으면 언제 젓는냐?"그러니까 "뜨거운 걸 어떻게 접니까? 이렇게 젓지요" "에헤에 그사람!" 하더니 팔때기를 여기까지 걷고는 "이 말죽을 언제 다 젓느냐"하면서 끓는 말죽 솥에다 넣고 휘위 휘위 저어서 손을 뺏다. 고각보가 뜨거운걸 죽자꾸나 참고 살이 익는 것도 사양안하구 그놈한테 우세 안 시킬라고 나와서 냉수에다 씻고 보니 살이 익어, 오무라져 버렸다고 한다. 손이 그래서 죽을 것만 같았다.

초립동이가 "꽤 뜨거울 텐데 저이가 저렇게 끓는 죽에 팔을 집어넣고 휘위 저으니 얼마나 뜨거우랴"하고 손가락을 넣어봤더니 하도 뜨거워, 손가락을 얼른 빼고 "저 사람은 나보다 엄청난 장산가보다"하고 그만 꼼짝을 못했다고 한다.

동막(東幕)에서 고각보는 소문난 사람인데 원산 오백리길에 험하게 굴어서 고각보라고 하면 울던 어린애도 그쳤다고 한다.

공민왕사당

「공민왕사당」은 창전동(倉前洞) 산2번지 즉 태창(太昌)터 뒤 와우산 동남쪽 산기슭에 오래된 느티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고려말 공민왕은 제위때 이곳의 한 정자에 머물면서 한강을 바라보고 시화(詩畵)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당(神堂)을 지은 까닭은 조선왕조 초기에 이 곳 서강 일대의 양곡 창고를 지을 때 공민왕이 이 곳 동네 노인에게 현몽하여 "여기에 당을 짓고 봉제(奉祭)하지 아니 하면 역사가 순조롭지 못할 것이다."하기에 이 곳에 와보니 영정(影幀)이 발견되었으므로 신당을 지었다 한다. 그리하여 매년 음력 10월 1일 자시에 제사를 성대히 지내왔는데 제사가 소홀하거나 불경사가 있으면 창고에 화재가 나는등 재난이 뒤따랐다 한다.

신당안에는 공민왕과 비(妃)인 노국공주(魯國公主), 왕을 호위하는 충신 최영(崔瑩)장군의 영정과 왕자, 공주와 옹주 등의 화상이 있고 그 앞에는 신당우물이 아직도 있는데 동네사람들이 최근까지 식수로 사용하였다.

공민왕때 왜구의 침입이 시작되어 이들에게 크게 시달려 왔던 탓인지 몰라도 주민들에 의하면 구한말 때 교역차 이곳에 머물렀던 일본상인 36명이 공민왕의 진노로 해서 식중독에 걸려 죽은 사실이 있었고, 일제때 이곳을 말을 타고 지나던 일본사람이 갑자기 말발굽이 땅에 붙어버려 움직이지 못하자 당황하여 칼로 말을 베어 죽이고 허둥지둥 이 곳에서 도망하고 말았다하는 이야기가 남아았다. 이러한 소문이 퍼졌는지 이곳 신당부근 서강동(西江洞)에는 일본사람이 살지 못했다고 한다.

또 사당앞에 「신당우물」이 있는데 상수동의 「당우물」,「왜우물」과 더불어 서강3대 우물로 유명했다.

손돌풍

한강에 대한 전설로는 윤청파(尹淸波)의 「전설찾아 삼천리」에 손돌풍(孫乭風)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려중기때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로 피난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고종(高宗)시대가 아니면, 조선시대 후금(後金)의 군대가 침입해 온 인조대왕(仁祖大王)시대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추측되는 때였다.

추격하는 적의 군대가 워낙 급하였기 때문에 피난길에 오른 왕은 한강에서 배를 타고 하류로 내려가 강화도로 건너가려는 뱃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왕의 마음은 착잡하고 불안한 가운데 배에 오르게 되었으며 왕이 탄 배를 젓게 된 사공은 특별히 성실하고 경험이 많은 사공중에서 가려뽑힌 손돌이었다. 손돌은 자기 배에 오르게 된 왕을 모시고 노를 젓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끝까지 안전하게 모시겠다는 마음가짐을 하고 열심히 배를 저어 나갔다.

그런데, 얼마쯤 강을 따라서 내려가다 왕이 앞을 내다보니 여울물이 있는데 손돌이 방향을 그 쪽으로 돌려 자꾸 노를 젓는 것이 아닌가!

위험하고 두려운 생각이 든 왕은 측근에게 지시하여 여울물쪽으로 가지 않도록 손돌에게 전달했으나, 손돌은 지시를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계속 그 방향으로 노를 젓는 것이었다.

이에 의심이 더럭 든 왕은 뱃사공 손돌이 적과 내통하여 왕을 물속에 빠뜨려 죽이려는 계획이 있다고 단정하여 「여봐라 저 손돌이를 곧 결박하여 참수하라」고 좌우에 명령하니 끌려온 손돌은 「강화도까지 안전하게 가는 뱃길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여울물은 위험해 보이지만 제가 안전하게 모셔갈 수 있습니다.

만약 저 여울물쪽으로 가지 않으면 위험하오니 통촉하십시오」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하였으나 왕은 끝내 참형의 명령을 거두지 않자, 손돌은 죽을것임을 알고 체념한 뒤 바가지 한 개를 올리면서 「상감마마, 만약 배를 저어 나가다 뱃길을 잃어 배가 위험하게 되면 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져 이 바가지만 쫓아가시면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마지막 말을 한 뒤 처형되었다.

손돌이 처형된 후 다른 뱃사공으로 대신 배를 저어가자 초겨울의 북서풍이 세차게 불면서 회색구름이 몰려오자 배는 좌우로 흔들려 도저히 뱃길을 잡을 수 없고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급한 나머지 손돌이 바친 바가지를 배 앞에 던지게 하니 바가지는 둥실둥실 배 앞에서 떠 가는 것이 아닌가! 왕이 탄 배는 바가지가 인도하는 대로 뱃길을 잡으니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왕은 무사히 강화도에 도착하여 생각해보니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라 판단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은 것이어서 측근에 명하여 비석과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그 바가지는 손돌의 혼이라고 말들 하며 그가 처형된 음력 10월 20일은 매년 북서풍이 거세게 불어 오는데 뱃사람들으니 이를「손돌풍(孫乭風)」이라 한다. 손돌의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북서풍이 되어 불어온다고 믿고 있는 이 뱃사람들은 이 바람을 매우 무서워하여 매년 음력 10월 20일에는 그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그가 처형된 곳을 「손돌목」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지금도 물살이 세고 배가 한번 이곳에 들어가면 위험하기 때문에 붙여진 곳이라고 한다.

일년 신수 점치기

연초에는 1년의 신수가 어떠할련지 궁금한 마음에서 점을 치는 습관이 있다. 일년지계는 재원이라고 하여 1년동안의 계획을 연초에 세우거니와 1년동안 닥쳐올 운명이 어떠할련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어쩔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업이 번성할는지, 과거에 합격할는지, 관계가 승진할는지, 무병건강하고, 재액은 없을런지등, 앞날에 전개될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미리 알고 싶어한다. 미리 알면 그에 대처할 수 있고 안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초에 가장 일반화된 점복은 토정비결이다. 가정이나 거리의 어디를 가나 토정비결을 보는 광경을 발견할 수가 있다. 토정비결은 꼭 믿어서가 아니라 거의 습관화되어 연초면 대개 한번은 토정비결을 보기 마련이다. 아이들은 제외되지만 어른들은 먼데 사는 가족이나 출가한 딸의 것까지도 보아준다.

연초에는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토정비결을 보아주기 위하여 임시로 점복사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토정비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짐작이 된다. 또 매년 토정비결 책이 베스트셀러의 위치를 차지할만큼 많은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정초의 토정비결을 통한 점복속이 얼마나 성한가 짐작된다.

토정비결은 토정 이지함이 만든 길흉화복의 예언서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점복서이다. 점괘의 산출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당년의 태세수에 연령수를 합한숫자를 8로 나누어 남는 숫자를 첫괘로 삼고, 다음 월건수에다 생월의 일수 즉 생월이 크면 30, 작으면 29를 합한 수를 6으로 나누고 남는 숫자를 둘째괘로 삼고, 마지막으로 생일숫자와 일진수를 합한 수를 3으로 제하고 남는 수를 셋째 괘로 삼는다.

이렇게 하여 괘 숫자를 산출한 다음에 토정비결 책의 같은 괘 숫자를 찾으면 종합괘사와 월괘사가 나타나 있다. 토정비결은 1년의 년운과 월운을 미리 알아둘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토정비결은 태세·월건·일진을 가지고 점치기 때문에 같은해·같은달·같은날에 출생한 사람은 동일운명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그래도 가장 흔한 점술법이다.

② 정초의 점복으로 옛날에는 오행점이 유행되었다. 오행점은 금·목·수·화·토의 오행을 가지고 점치는 방법인데 음양술에 근거를 둔 점복이다.

다섯 개의 나무와 엽전에 오행의 각자를 새기어 가지고 주문을 암송하면서 던져 나타난 글자를 금·목·수·화·토에 맞추어 점사를 읽고 풀어 점치는 것이다. 다섯자를 가지고 점사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점사의 종류가 토정비결처럼 많지 않다.

③ 설날에 짐승의 동작을 보아 점치는 방법도 있다. 즉 소가 일찍부터 기동하면 풍년이 들고, 송아지가 울어도 년사는 풍조이며, 까치가 울면 길조이며, 도깨비불이 일어도 길조이고, 까마귀가 울면 풍재와 병마가 있고, 개가 짖으면 도둑이 많으며, 개보다 사람이 먼저 일어나면 한 해를 무료하게 보내게 된다고 전한다.

④ 또 설날의 일기를 보아서 그 해의 일들을 점치는 수가 있다. 즉 바람이 없이 날씨가 맑으면 풍년이 들고, 해가 붉으면 한재가 있고, 푸른 빛이면 풍재가 있으며, 검은 구름이 하늘에 가득하면 홍수를 만나게 된다고 한다. 또 북풍이 일면 풍작이고 남풍이 일면 흉작이라고 믿고 있다.

어촌에서는 설날에 바람없이 맑으면 더욱좋고 남풍이 불면 풍어, 동풍이 불면 흉어라고 전하여 농경과 어로에서 때로 상반되는 수도 있다.

⑤ 정초에는 1년의 일을 미리 알고자 하는 궁금한 마음에서 여러 가지 점을 치는데 그 중에서 윷을 가지고 점치는 것을 윷점이라 부른다.

윷점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으니 많은 사람이 편을 짜서 집단적으로 놀아 그 결과로 마을의 운수를 점치거나 그 해의 풍흉을 점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윷을 놀아 나타난 숫자를 가지고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방법이다.

집단의 운수를 점치는 윷점은 남녀로 편을 가르거나 또는 사람 수대로 짚을 길고 짧은 것의 두가지로 잘라 골라 잡게하고 긴 편과 짧은 편으로 나누어 놀이를 하는데 수답과 천수답으로 미리 정하고 그 승부에 따라 풍년이 될 것인가 흉년이 될 것인가를 점치는 방법이다.

개인의 운수를 점치는 것은 윷을 던져 그 숫자에 따라 세가지 괘를 만들고 그의 수에 따라서 정해 있는 점사를 해석하는 것이니 일일일괘에서 사사사괘까지 64괘가 있다.

윷점은 세 번을 던져서 괘를 얻으므로 방법이 간단해서 부녀자와 아동들사이에 널리 행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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