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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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Gongdeok-dong)

공덕동은 이곳에 있던 옛지명이 공덕리(孔德里)였으므로 유래되었다. 공덕동을 이루고 있는 옛날의 자연부락인 한 정동은 큰우물이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인데 공덕동 사람들이 다 마실 수 있을 만큼 수량이 풍부한 곳이었다. 따라서 이 우물은 마을 제사나 행사때는 물론 이웃지역에서도 사용했는데 가뭄에도 수위의 변화가 없었다. ´한정´이라는 뜻은 큰우물·우두머리우물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만리재는 만리창(萬里倉)이 있었으므로 유래된 동명이면서 고개 이름인데 대현(大峴) 혹은 큰고개라고도 한다. 아현(애고개)에 대응한 것인데 고개가 길고 높아서 넘어가는 것이 마치 만리나 된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한 편 공덕동 298-16번지와 342번지에는 이문(里門)이 있었다. 도둑을 막기 위해 세웠던 이문은 마을 자치단위로 순번을 정해 야간 순찰을 하는 일종의 숙직소였다. 조선시대의 이문은 도성 안에 세워졌으며 서소문 밖은 훈련도감에서 순번을 돌던 칠패와 팔패로 구성되었다. 공덕동 방면은 주로 칠패에서 순라를 행했으며 용산방면과 연결되어 있었다.

공덕동396-4번지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장인 아소정(我笑亭)이 있다는 표석을 세웠으므로 푯돌배기 혹은 표석골이라 불렀다. 천하를 호령하던 대원군이 청군에 의존하여 세력을 찾은 명성황후 민씨에 의해 운형궁에서 유폐생활을 하고 있던 중 1895년 4월 아끼던 손자 준용마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강화 교동으로 유배형을 받게 되자 분노하여 성을 떠나려하다 제지되자 성안의 운현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있던 별장에서 머물게 되었다.

지금의 동도고등학교 자리인 이 별장에서 사실상 은둔생활을 시작하던 대원군은 자신의 일생이 너무나 덧없음을 뒤돌아 보고 스스로 조소한다는 뜻에서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아소정이라 하였다. 곧 ´내가 내자신을 비웃는다´는 뜻이었다. 조정에서는 대원군이 아소정에 거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입구에 표석을 세워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였다.

늙 고 병든 대원군은 부대부인 민씨의 죽음을 이곳에서 맞이하였고 1902년2월 그 역시 아소정에서 서거하자 이곳에서 장사를 지냈으므로 일대를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불렀다 그의 사후 아소정에 대원군의 묘소와 사당을 만들었으나 1910년 묘소를 경기도 파주군으로 이장하고 1917년2월29일 손자 이준이 죽자 같은해 4월 옛날 아소정 자리에 무덤을 만들었다. 그러나 1936년 도시계획에 의해 공덕동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이준의 사당과 묘소도 선산인 경기도 파주군으로 이전하였다.

한편 주인없는 아소정터는 총독부 소유의 국유지로 편입되었다가 용도변경에 의해 학교부지로 변경불하되어 동도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운동장 한 가운데 동그마니 놓여있던 아소정은 학생들의 학교생활에 불편함을 초래함은 물론 미관상이나 학교운영상에도 좋지 않아 철거하고 서대문구 봉원동 소재의 봉원사가 6·25동란으로 소실되었으므로 이절의 대방(大房 : 염불당)으로 1966년에 이전 복원하게 되었다.

공덕동 105번지 현재의 서울지방법원 서부지원자리는 원래 마포형무소 자리였다. 경성형무소라는 명칭으로 1920년대에 지어졌는데 서대문형무소에 기결수를 분산 이전시켜 수용하였으나 안양에 교도소를 새로 건립하여 이전하면서 그 터는 학교부지로 할 것으로 결정되어 경서중학교가 있다가 지금은 서부지원이 옮겨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 유적지」

공덕동 105번지 현 서울 지방법원 서부지원 자리에는 1912년 일제가 경성형무소(후에 마포형무소로 개칭)를 설치하여 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순국하고 옥고를 치루던 곳이다.

대흥동(Daeheung-dong)

대흥동의 동명은 동막하리를 대흥정이라 하여 1936년 서울의 구역을 확장할 때 편입되면서 비롯된다. 대흥동이 발 전하기 시작한 것은 1929년 3월 용산~당인리간을 왕복하는 용산선을 개설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옹기를 만드는 한갓진 마을에 불과했으나 당인리 화력발전소에 소용되는 각종 물자 운반을 하는 철도의 개통으로 중간 기착점인 동막역이 건설되면서 분주해졌다.

이 동막역 근방의 우물을 새우물이라 했는데 화차의 냉각수로 사용하기 위한 물을 구하기 위해 새로 팠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이 우물이 있는 동네를 새우물거리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논가운데 있던 우물을 논가운데 우물·논우물·답중동우물 등으로 불렀는데 논물을 대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동막역을 만들고 철도를 부설하면서부터 동막역을 중심으로 하여 만들어진 마을의 혈이 끊어졌다고 하는데 원래 있던 마을 혈매기라고 불렀다. 장사와 큰인물이 난다고 해서 좋은 집터로 여겼는데 혈이 끊어지면서 마을도 가난해졌다고 한다.

대흥동에는 불당재가 있다. 최영장군을 모신 당집이 있는 동산근처인데 대흥동 416번지에 있는 동제당을 불당재라고도 한다. 17세기결 동막하리에 화재가 빈번하자 어느 도사가 덕물산의 최영장군 제당을 이전하면 화재예방이 된다 해서 당을 현 위치로 이전 건립하였다. 불이 나지 말라는 뜻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된 것인데 곧 "불이 안나는 당"이라는 뜻을 가진 불당재이다. 불당재 안에는 최영장군 부부를 주신으로 모셨으며 명덕당이라는 4칸의 신당 안에 공민왕을 비롯하여 신격이 밝혀지지 않은 무속신을 봉안하고 있었다. 동제당을 겸했으므로 속칭 불당재라 했는데 지금은 화재로 소실되어 없어졌다.

숭문고등학교 옆에는 서낭당이 있었다. 서낭당 일부가 학교터로 편입되었는데 이 서낭당 앞의 서낭목은 느티나무로 동네를 지켜주었다. 서낭당 주변에 있는 마을에서는 많은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고려장을 행할 무렵 왕명에 의해 노인들은 필요없는 존재라 하여 하루 아침에 이들 노인을 전부 노고산에 갖다 버리라는 고을원의 방이 붙었다.

서 낭당 언덕에 살던 한 젊은 부부는 차마 늙고 병든 어머니를 버릴 수 없어 밤새도록 별도로 집 한칸을 짓고 그곳에 어머니를 모시면서 울긋불긋한 옷을 입히고 고깔을 세워 제단위에 앉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동네에 내려가 간밤에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마을에 재앙이 곧 닥칠 것인데 나를 잘 모시면 이 재앙은 피해 갈 수 있다」는 계시를 해주길래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언덕위에 없던 집 한채가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집안을 들여다보니 꿈속에 나타난 신령이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있다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사람들이 놀라서 함께 달려가보니 과연 고깔 쓴 노인이 앉아있는데 신기하게도 동네사람들의 집안내력이며 마을 일을 알아 맞혔다. 오랫동안 동네일을 맡아보는 아들내외의 이야기를 듣고 또 언덕 위에 살고 있었으므로 동네를 내려다보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던 노인이었으므로 동네 이야기에 대해서는 줄줄 욀 수밖에 없었다. 놀란 동네사람들은 신이 내려왔다며 노인이 있는 집 둘레에 금줄을 두르고 일반인의 접근을 막았으며 조석으로 음식을 차렸다.

고을의 원도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마침 부정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 일이 나랏님의 귀에 들어가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초조할 때였다. 이에 노인은 "어찌 나라의 돈을 착복해서 자리 밑에 감추고 조강지처를 노비로 만들었느냐"며 호통을 치고 즉시 원래대로 할 것을 말하였다. 너무 정확한 지적에 원님도 놀라 수백번 절을 하고 감사로 돌아간 후 노인의 지시대로 시정한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노인은 죽을 때까지 서낭당에서 동네사람들이 바치는 음식을 섭생하며 살다가 죽었는데 이 때문에 서낭당 뒷산을 노고산(老姑山)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도화동(Dohwa-dong)

도화동의 동명은 이곳이 조선시대부터 도화내동이라 부른데서 유래된다. 도화동은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있으 므로 복사골이라 불렀는데 삼성아파트와 우성아파트 일대를 말한다. 산비탈인 이곳의 복숭아꽃은 절경이어서 밤섬에서 보면 쪽빛 한강물과 붉은 분홍색의 복숭아꽃이 서로 어우러져 무릉도원처럼 느끼게 해준다.

도화동에 얽힌 전설이 두 개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복숭아 골에 살던 고종 때의 김판돌이라는 사람이 매일 밤섬에 가서 고기를 잡아 칠패시장에 내다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갔는데 어느날 문득 율도에서 고기를 잡다 말고 고개를 들어 자기가 살던 집을 바라다 보니 절경중에서도 으뜸이라 연신 감탄을 했다. 바닥에 닻이 닿는 순간 땅인줄 알고 바로 뛰어 내리다가 익사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아득한 옛날 옛적 마음씨 착한 김씨 노인과 외동딸 도화낭자가 함께 복사골에 함께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다. 곧 이곳에 사는 도화낭자의 아리따운 모습과 마음씨는 천관(天官)의 귀에까지 들려 옥황상제의 며느리로 간택되었다. 김노인은 딸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은 기쁘나 외동딸과 영 이별할 것을 생각하니 서운하기 이를데 없었다.

이 러한 노인의 마음을 애처롭게 생각한 천관은 천상의 천도복숭아를 하나 주고 갔는데 노인이 그 씨를 집 근처에 심고 복사나무가 크는 것을 딸을 보는 마음으로 살았다. 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복사나무는 번성하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노인과 도화낭자를 생각해서 복사나무를 심어 가꾸면서 일대가 복사꽃으로 뒤덮혔다는 이야기이다.

앞의 것은 이 지역 일대가 자연생 복사꽃으로 뒤덮혔으므로 지명유래가 되고, 뒤의 것은 인위적으로 복숭아 밭을 조성했다는 것인데 경원선이 가설될 무렵만 해도 일대는 복숭아밭이 있었으나 그후 점차 주거지로 바뀌면서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지금은 도화동이라는 동명만 있을 뿐이다.

도화동은 비교적 지대가 높아서 크고 작은 고개가 많이 있었는데 용산 새창으로 넘어가는 새창고개와 용산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용신고개가 있었다. 새창고개는 사창고개라고도 하는데 용산에 있던 별영창이 있으므로 지명이 유래되었고 용신고개는 삼개고개라고도 하는데 마포를 이름자 그대로 이두음화 시킨 한글로 쓴 것이 삼개이기 때문이다.

298번지에는 홍문(紅門)이 서 있었다 하여 홍문터라 부른다. 이곳의 홍문은 조선 영조때 살았던 효녀 지심을 위해서 마을사람들이 합세해서 효행을 알려주어 세워진 것이다. 지심은 일찍 어머니가 죽고 동냥젖으로 컸는데 어린나이에도 몸이 불편한 아버지의 뒷바라지는 물론 동네의 굳은 일은 도맡아 하였으므로 마을사람들 모두가 친딸처럼 여겼다.

어 느날 지심이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음식을 장만하기 위해 집을 나서 얼마가지 않았을 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호랑이 한마리가 버티고 앉아 잡아 먹을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지심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고기가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왔던 차에 지심의 눈에는 호랑이가 전혀 무섭지 않고 다만 고기덩어리로 보였다. 맨손인 그녀는 이런 생각으로 호랑이와 서로 마주보며 서 있었는데 호랑이보다 더욱 기세등등한 자세였다.

이윽고 호랑이가 지심에게 달려들어 잡아먹을 태세를 갖추는 순간 지심도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연약한 어린여자의 힘으로 호랑이를 대항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부터 지심은 점차 수세에 몰리고 말았다. 호랑이도 이 무렵은 지친 상태였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순간 깜빡 기절을 했을 때 총소리가 나더니 호랑이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호랑이를 전문으로 잡는 포수가 때마침 길을 지나다가 이 광경을 보고 구해주었던 것이다. 지심은 그간의 사정을 말하여 포수는 호랑이의 가죽만 가지고 지심은 호랑이 고기를 얻어 실성한 아버지를 위해 호랑이고기로 탕을 끓이고 구워서 정성껏 봉양한 끝에 아버지는 낫게 되고 이런 소문을 듣게 된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가 지심의 갸륵한 정신을 영조께 아뢰어 효녀정문을 내리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지심을 위해 세워졌던 정문은 고종 초까지 있었는데 일본군이 프랑스함대가 마포강까지 들어올 무렵 이 정문이 군병들의 진로에 방해된다하여 철거하여 그 터만 남게 되었다.

「복사골 전설」

도화동 산언덕에 복사꽃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마음씨 착한 김노인의 외동딸 도화낭자가 옥황상제 며느리가 되면서 선관이 김노인에게 주고간 천도복숭아를 심어 복사골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사창고개 」

백범로의 등성이로 도화1동에서 용산구 효창동 사창마을(세창고개) 방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일컬는다.

「대동우물터 」

도화1동 2-224호에 있던 우물로 을축년 대홍수에 용산의 이촌동에 살던 이재민들이 도화동으로 이주해와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

동교동(Donggyo-dong)

동교동의 동명은 동쪽잔다리 곧 윗잔다리를 줄여 부른데서 비롯된다. 동교동의 동명유래가 된 윗잔다리는 망원동 길 과 동교동길 사이의 복개도로 오른쪽에 있는 잔다리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곳이 윗잔다리도 동세교리가 되기 때문이었다. 용산선 철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있는 120여가구가 윗잔다리로 된다. 와우산 기슭에서 이어져 내려오므로 동교동의 지형이 높아서 그 서쪽은 아랫잔다리, 동쪽을 윗잔다리가 된다.

동교동은 궁동이라 하여 연희궁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서교동 지역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양화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점은 서교동과 같다. 동교동은 1957년 서교택지조성사업에 의해 형성된 것이 현재의 지형인데 그 이전에 형성된 마을은 농촌의 전형적인 풍경이었다. 개발이후부터 중상층이 살고 있어서 마포구의 어느 지역보다도 비교적 주민 이동이 적은 편에 속하였다.

신촌전화국 근방에는 강성생 혹은 강성샘이라는 웅덩이가 있었다. 둘레 20평 정도의 수렁인데 사람이 빠지면 나올 수가 없는 갯펄처럼 된 곳인데 한강과 통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지금 신촌전화국 뒷편의 복개도로의 하천이 한강까지 유입되고 그 하천의 물이 이 수렁과도 통했기 때문이라 한다.

옛 사람들은 아기의 태를 이곳에 버려야만 무병장수 할 수 있다 하여 도성안에 있는 사람들도 이곳까지 와서 태를 버렸는데 이 태가 썩는 악취가 대단해서 일제 때는 태를 버릴 경우 벌금 등 처벌을 한다는 팻말을 붙여 놓기도 하였다.

서교동 336-1번지에는 정자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도 수렁우물인데 한강물이 불어나면 이 우물의 수위도 올라가고 그 반대가 되면 우물수위도 낮아진다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왜냐면 한강과 우물과의 직선거리도 상당할 뿐만 아니라 한강변 합정동과 이곳의 지질구조도 조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신촌전화국 자리는 정종막웅덩이라 불렀다. 1920년대 마포형무소 건립을 위해 이곳의 흙을 퍼내 벽돌을 만들었으므로 생겨난 웅덩이었다. 웅덩이 바로 옆에는 죄수를 수용 감독하기 위한 죄수막이 있으므로 정종막이라 하였다. 한편 노고산동 56-88번지 앞의 냉정우물은 냉천이라고도 하는데 부스럼이 난 사람이 머리를 감은 후 동전을 우물 속에 던지면 부스럼이 낳는다는 속설을 갖고 있다.

부 스럼은 열이 많은 사람에게 발생하는 일종의 곰팡이균 번식작용인데 찬물로 감으면 열을 식혀주는 것이며 동전을 던진다는 것은 치료를 해준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 하겠다. 동전의 성분이 물에 녹아 많은 무기질을 함유하므로 냉정우물의 효과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새동네 혹은 신촌이라 부르는 곳은 동교동 12통 및 13통 일대이다. 용산선을 처음 부설할 때 철도계획선에 살고 있던 주민을 집단 이주시킴으로써 생겨난 동네로 60여년 전만해도 120가구였다. 이때는 고씨 집촌성이라 할 만큼 고씨성을 가진 사람이 많이 살았으며 그외 황씨, 김씨, 송씨, 노씨, 장씨, 임씨, 오씨 등이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망원동(Mangwon-dong)

망원동의 동명은 이곳에 망원정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망원정의 동명이 유래된 망원정은 망원동 137, 207-1 번지 일대인 양화나루 서쪽에 있었는데 태종의 아들이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별장인데 1424년에 건립되었다. 1425년 왕이 농사형편을 살피러 이곳에 거동했다가 새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비가 내려 온 들판을 흡족하게 적시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며 정자의 이름을 희우정(熹雨亭)이라 하였다.

효령대군은 왕의 이같은 행차와 명명에 깊이 감사하며 당시 서도(書道)로 이름높던 부제학 신색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고 시문의 대가인 춘정 변계량(卞季良)에게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이때 지은 변계량의 기문은 "정자의 제도가 사치하지도 않고 누추하지도 않은데 백악산이 뒤에서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서 흐르며 서남쪽의 여러 산은 넓고 멀어서 아득하여 구름과 하늘과 연기가 물밖으로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한다. 굽어보면 고기·새우도 역력하게 셀 수 있는데 바람실은 돛과 모래위의 새들은 바로 정자 아래서 오가며 천여그루의 소나무는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위에서 아른거린다."하였다.

희우정은 강변과 가깝게 있는 누각 형식의 건물로 둘레에 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주위에 소나무와 버드나무가 울창했는데 왕이 이곳에 기거했던 1445년에는 지중추사 이장(李藏)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주화질여포를 발사하여 실전을 방불케하는 훈련을 하여 세자인 문종과 대군 등이 희우정 서쪽 봉우리에 올라 관람하였다.

1484 년에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소유로 바뀌게 되자 월산대군은 정자를 보수하여 "먼 경치도 잘 볼 수 있다"는 뜻으로 망원정(望遠亭)으로 하였다. 성종은 세종때의 예에 따라 매년 봄 가을 이곳에 납시어 농사의 정도를 살피고 수전(水戰)연습을 관람하였으며 문인명사들과 시주(試酒)를 즐기기도 하였으나 형인 월산대군이 죽은 후에는 정자를 찾지 않았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1506년 연산군은 창의문 밖 탕춘대에 호화찬란한 탕춘정(蕩春亭)을 짓게 하고 양화도에서 탕춘대성이 있는 장의동 어구에 이르는 거리에 수로를 파서 한강물을 끌어 들여 탕춘정 앞으로 흐르게 할 것을 명하였다. 그런가하면 동년 7월에는 한강가 망원정을 크게 확장할 것을 명하였는데 초가지붕에 건물은 천여명이 앉을 만큼 크게 짓되 정자위에서 바라다보이는 어떠한 건물도 모두 철거하도록 하였다. 정자의 이름도 수려정(秀麗亭)으로 고치게 하였다.

그 러나 동년 9월 중종반정으로 모든 공사가 중지되고 철거됨에 따라 망원정을 본래의 경치좋은 모습으로 명사들이 청유(淸遊)를 즐기는 명소로 바뀌었다. 경기가 좋은 이곳은 주로 명나라 사신 접대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잠두(蠶頭)와도 가까워 잠두로 가는 길에 이곳으로 들리는 사람도 많았다. 복원되기 전 희우정의 그림은 작가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강안 절벽 암반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마루 둘레는 난간을 돌렸고 팔작지붕인데 1925년 을축년 홍수로 소실된 것을 1991년에 복원하였다.

473, 476번지 일대는 한강으로부터 올라온 가물치,잉어,메기 등이 많아 밤세워 고기를 잡았던 방울내였는데 참새가 많아 밤새도록 호롱불을 켜고 참새를 잡았다고 하나 망원동의 대부분지역이 1960년이후 택지개발로 인해 구획정리가 되면서 공동주택이 형성된 곳이 많다. 강변도로와 동교로 사이에는 공장지구가 형성되어 있으나 그외의 지역은 주택지구로 형성되어 있는데 특히 망원동 450-3번지의 망원제1유수지는 홍수때 한강물이 역류하여 넘치면서 주변일대가 침수된 사건이 있었다.

상암동(Sangam-dong)

상암동의 동명은 수상리와 휴암리에서 각각 한 글자씩 합쳐서 만들어졌다. 상암동은 1914년 4월1일 경성부 연희 면의 수상리·구리동·휴암과 고양군 하도면 덕은리 일부(난지도)를 합하여 고양군 연희면 상암리로 하였다. 1949년 8월13일 대통령령 제159호로 서울시로 편입되고 이튿날 대통령령 제160호로 은평출장소 상임리로 되었다.

1950 년 3월15일 서울시조례 제10호로 상암동이 되었으며 1955년 4월18일 서울시조례 제66호로 성산동·상암동·중동을 병합한 성암동이 되었다. 1975년 10월1일 대통령령 제7816호에 따라 서대문구 상암동이 마포구로 편입되면서 동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상암동은 행정동과 법정동이 일치하는 동이다.

상암동을 이루고 있는 구석말은 귀리(歸里)의 구석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귀이깨라고도 한다. 모로돌아 한강가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인데 산17번지와 83,84번지 일대이다.

물치는 물위치 수색(水色)·수상리(水上里)·수생리(水生里)라 하는데 수색동 앞 넓은 들 건너 마을을 말하며 장마때면 한강물이 이곳 앞까지 오므로 붙여진 명칭인데 154~163일대이다. 부엉바위골은 휴암동이라 하는데 이곳에 휴암이 있어서 명칭이 유래되었으며 산28~32번지 일대이다. 원래는 휴암이라 했는데 명칭이 바뀌었다. 이곳 부엉바위에서는 부엉이가 울면 밤이 된다는 뜻이고 구석말로 가는 걸음도 멈추었다고 한다.

압도(鴨島)·중초도(中草島)는 부엉바위 뒤로 있는 산이 매봉산인데 밤이되면 매산의 매가 잠들고 낮에는 부엉이가 잠들었다고 한다.

압도·중초도는 난지도(蘭芝島)라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난초와 지초로 어우러진 경치 아름다운 곳이었다. 1977년 이곳을 서울시 쓰레기처리장으로 만들기 전만 해도 갈대숲이 아름다워 청춘남녀들이 데이트를 하거나 애정영화의 셋트장소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편 마암으로 구성된 난지도는 한강하류 삼각주로서 많은 동식물이 서식하던 곳이었는데 8m정도의 자연제방이 섬의 북단에서 동서방향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제방을 넘으면 다시 자연제방이 되기 때문에 섬 남단의 절벽과 사이에 자연스러운 모양의 제방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자연장소였으므로 조선말까지는 이곳이 뱃놀이의 정류소로도 이용되었다.

하중도이므로 충적평야(沖積平野)가 형성되어 전답으로 이용되어 오던 이곳이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1977년 1월부터 19억원의 공사비와 연 70만명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7월까지 방수제방축조에 성공함에 따라 홍수피해를 줄이게 되었는데 이 지역의 매립을 위해서 서울시내 쓰레기를 활용하기로 하였다.

「난지도」

상암동은 옛부터 난꽃과 영지의 자생지인 난지도가 유명했다. 옛 선조들은 나라의 정사가 잘 되는지를 알려면 이곳의 난꽃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하였으며 택리지에서 좋은 풍수조건을 가진 땅이라고 소문이 났다. 1977년 서울시 쓰레기처리장으로 만들기 전만 해도 이곳은 갈대숲과 샛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지금은 월드컵주경기장 건설 및 생태공원 조성 등 새천년 밀레니엄 도시의 꿈으로 새롭게 도약하는 지역이다.

서교동(Seogyo-dong)

서교동의 동명은 서쪽 잔다리를 줄여서 부른 데서 유래된다. 서교동의 명칭이 유래되었던 아랫잔다리 곧 서세교 는 지금의 서교동사무소 일대를 말하는데 한강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작은 다리가 있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곧 작은 다리가 잔다리로, 이를 한자로 고친 것이 세교(細橋)가 되는데 동서 두군데에 있던 것중 서쪽의 잔다리에서 서교동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도당꿀은 신촌전화국 근방인데 연희동에서 합정동에 이르는 개천이 복개되어 지금은 이면도로로 활용하고 있으나 옛날에는 이곳을 흐르는 개천의 물이 맑고 깨끗해서 사람들이 모여 빨래를 하거나 김장철에는 무우나 배추를 씻는 등 허드레물을 이용했기 때문에 특히 신촌전화국 근방의 개천가에 있는 큰 바위를 세답바위라 하였다. 빨래터 큰 바위라 하는데 웬만한 이불호청 한 장 정도는 너끈하게 널어 말릴 수 있는곳이 바로 이 세답바위였다.

동 네사람들, 특히 여자들의 사랑방역할을 하여 각종 정보가 교환되기도 했는데 「서답바위」라고도 불렀다. 이 지역에서는 세답바위에서 한번 거론된 사람은 두 번 다시 빨래터 출입은 물론 동네 출입조차 할 수 없어서 세답바위가 동네 부인들의 재판소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일찌감치 투기바람이 불었던 서교동은 일제 때까지만 해도 한적하고 넓은 들판이어서 양화나루로 가는 길목이었다. 각종 채소밭이 펼쳐지던 구릉지대였는데 한말 선교사들이 양화나루를 건너 지금의 양화로를 거쳐 신촌~아현 일대로 하여 도성으로 들어오는 과정인데 계절의 변화를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대 한제국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비숍(Bisop)여사는 이 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면서 느낀점을 '길이라고는 하나 가마 두 대가 교행하여도 서로 부딪침이 없을 만큼 넓어서 평원같았다. 나중에 도성으로 들어간 후 조선의 길이 얼마나 좁은가를 깨달았지만 양화나루에서 얼마되지 않은 곳 잔다리라는데는 길보다 오히려 광장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한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만난 여인들은 더욱 인상적이다.

농촌일을 하면서도 흰색옷을 깨끗하게 손질해 입고 있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들판 한가운데로 흐르는 물은 하늘빛과 같아서 온통 푸른 보석으로 박아놓은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라고 하여 조선에서의 입국소감이 서교동 때문에 무척 감명을 받은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느낌은 도성으로 가까이 갈수록 실망을 거듭한 쪽으로 옮겨진다. 곧 도성 안의 도로는 얕고 폭이 좁은데다가 오물과 하수시설의 미비로 질퍽거리기 일쑤라는 글을 함께 남겨 놓음으로서 상대적으로 서교동 일대의 깨끗한 느낌을 더욱 강하게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랫잔다리 안쪽 마을은 안말이라 하고 현 한빛은행 서교동지점 근방은 밤나무가 많이 자라는 곳이라 했으므로 밤동산이라고도 했는데 바로 이 밤동산이 시루처럼 생겼으므로 시루기봉·시리미 혹은 증산이라 하였다. 증산아래 동네를 증산마을이라고도 하였다.

증산마을에도 부군당 혹은 도당이라 부르던 마을 수호신을 제사지내던 곳이 있었는데 이 도당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도당물 혹은 도당우물이었다. 바가지샘이라고도 부르던 도당우물은 부정탄 사람이 지나가면 금방 물빛이 탁해지므로 제사준비를 할 무렵에는 도당물 근처에 금줄을 치고 사람들의 근접을 막았다. 도당우물과 도당도 택지개발사업을 실시하면서 모두 없어졌다.

한편 1957년의 서교구획정리사업지구가 고시되면서 일대의 모습을 전혀 다르게 만들었으며 하루에도 수십대씩, 당시로는 보기 힘든 짚차가 왕래하였다. 하얀 먼지를 날리며 평원 한가운데를 달리는 이 짚차의 행렬이 바로 투기행렬이었다. 이 덕택에 서교동 일대는 마포지역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복잡해진 곳으로 발전할 수가 있었다.

성산동(Seongsan-dong)

성산동의 동명은 성산이 있었으므로 유래된다. 성산은 한강대안 강서구 공암에서 봉화를 받아들이는 곳으로 겸재 정 선이 양천대감으로 있을 때 이곳 성산을 소재로 하여 그림을 그린 것이 여러점 있다. 성산동을 이루는 풀무골은 야동(冶洞)이라고도 부르는데 시영아파트~불광천 건너 상암동으로 가는 길목이다. 조선 효종때 김자점이 역모를 일으키기 위해 군사를 동원할 자금을 구하느라고 이 일대에 위조엽전과 병기제작하던 사주전이 있었는데 엽전을 녹이기 위해 풀무간을 만들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풀무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신촌 농협지점 근방은 바로 이 풀무간에서 병기와 엽전주조하는 것을 보호 감시하기 위해 도성쪽을 향해 망을 보던 장소였다. 이 망고개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도성쪽에서 사람이 나오면 마포구청 방면의 소식고개를 향해 달려갔는데 망고개·소식고개·풀무골은 김자점이 처형당하면서 주변 일대에 대한 수색작전을 전개해서 많은 사람이 살육당하기도 했다.

1950년대 초기만 해도 이 일대가 논밭으로 되어 있던 까닭에 녹슨 옛날 엽전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었다. 성산2교를 지나 한양성심병원 뒤 밭과 주택이 있는 곳은 묘꼴 혹은 미꿀이라 하는데 옛날에는 골짜기가 깊어서 도둑이 많고 무서워서 인가가 살지 않았다고 하는 곳이다. 성산2동사무소 일대는 무리울 혹은 무이동(武夷洞)이라 하는 곳이다. 무리를 지지 않으면 행동하기가 힘들 만큼 으슥한 곳이어서 언제나 떼지어 지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 성산노인정에서 동사무소쪽으로 올라가는 고개는 동노고개·동턱고개라 하는데 숨이 턱에 찰 만큼 가파르다 해서 동턱고개라 하였다.

소 나무가 우거졌는데 정월 대보름날에는 이곳의 서낭당에서 서낭제도 지냈다. 소나무가 서낭이었는데 이곳 서낭당은 길을 가던 나그네면 누구나 무사한 여행이 되어 달라고 비는 뜻에서 서낭당에 빌고 지났다. 일대에 아파트 건설공사를 하면서 서낭당도 없어졌는데 흔적을 알려주는 소나무만 몇그루 남아 있다.

성산의 원 마을 끝에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해서 새말이라고도 불렀는데 무이동 바로너머 마을이 되기도 한다. 후동은 공동묘지 뒷동네라고도 부르는데 너머골, 뒷골 등으로 부르며 무이동 너머에 있었다. 이러한 성산동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홍제천의 직강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인데 굽어있던 원래의 홍제천을 외곽으로 꺽어내면서 주변의 경지정리로 들어갔고 이것은 광복후 성산지구 택지조성으로 바뀌어짐에 따라 현재의 지형 모양으로 바뀌었다.

「풀무골」

월드컵 경기장 부근 성산동 499번지 일대엔 옛부터 농기구 등을 만들던 풀무골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조선 효종때 김자점이 이곳에서 위조 엽전과 사주전을 만들기도 했다.

신공덕동(Singongdeok-dong)

신공덕동은 이곳의 옛이름이 신공덕리이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신공덕동을 이루고 있는 단위부락으로는 말등테 · 신촌·호박밭·홍예동·감나무밭·복사나무동산을 들 수 있다. 신촌은 새로 생긴마을이라는 뜻이다. 신공덕동 일대가 조선 말까지만 해도 야산으로서 옛지명에서 보듯 갖가지 과실나무가 심어져 있거나 채소재배지였으므로 사람이 사는 지역은 아니었다.

이러한 자연환경을 가진 곳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을미사변이 일어날 무렵이어서 일본군인이 횡행하는 도성 안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싫어 전날의 판서벼슬을 지낸 김대감이 일가식솔을 이끌고 낙향하여 농부가 되려는 생각으로 마포나루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서 정착한 곳이 이일대이다. 이때부터 부락이 형성되었으므로 신촌 혹은 새말이라는 명칭이 붙게된 것이다.

한편 신덕교회가 있는 곳은 대한제국 무렵까지 부군당으로 사용되었는데 당시 배경을 살펴보면 명성황후 민씨가 임오군란으로 장호원의 민응식의 집에까지 피난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무녀 이씨가 환궁일자를 정확하게 맞히면서 그녀를 진령군으로 봉하고 미신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면서 민간에서는 각지에 당집이 세워지고 민비는 내탕금으로 부군당제사때마다 떡과 술을 보냈다.

한편 지금은 백범로로 편입된 92번지일대에 홍문(紅門)이 서있다 해서 홍문집터라고 하였는데 홍문은 효부·효자·열녀 등을 위해 세우고 후세사람들에게는 이 일을 본 받으라는 뜻에서 세워진 것이다. 홍살문이라고도 하는데 이 문이 세워지면 가문의 영광은 물론 마을 전체의 영광으로 누렸다. 그런데 홍문은 효성에 관계있는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고 효창원에 있는 홍살문을 뜻하는 것이므로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공덕동의 서울지방법원서부지원자리는 마포형무소가 있었으며 그 인근에 있는 만리동길의 동서양쪽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복역수들의 작업장이었다. 마포형무소를 만들 때 중국인 노동자 쿨리를 대거 채용하여 공사장으로 투입했는데 이때 쿨리들의 집단 숙식장소가 지금의 공덕시장부근이다. 이들 쿨리가 형무소 건축노동시간 이외에는 자신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근처의 야산을 개간하여 채소밭을 일구면서 식수와 관개용수로 개간한 것이 호인(胡人)의 우물이다.

경원선 공덕리 역이 있던 곳은 형무소 연와공장이었는데 지금의 공덕동 로타리에 해당된다. 이 공장에서는 3·1운동 이후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많은 항일 국구민족운동가들의 작업장소였는데 특별히 사상범으로 분류된 항일운동가들은 이곳의 작업장에 배치되지 않았고 회유가 가능하다고 판정된 사람들만을 배치했으므로 이른 시간 이들의 무리가 헌병대와 간수들의 감시를 받으며 작업장으로 향할 때면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분노에 사로 잡히기도 하였다.

신수동(Sinsu-dong)

신수동의 동명은 원래 이곳을 이룬 자연부락이 신수철리(新水鐵里)였는데 1936년 경성부로 편입하면서 신수정 신 수정이라 하던 것을 광복 후 신수동이라 한데서 비롯된다. 신수동의 옛이름인 신수철리는 새로된 수철리라는 뜻인데 원래 수철(水鐵)은 무쇠를 뜻한다. 신수동 110번지 일대를 무쇠막이라고 하는데 무쇠솥이나 농기구 등을 만들어 팔거나 국가에 바치는 공장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곧 무쇠+막으로 "막"이란 물건을 만드는 막사, 장소라는 뜻이다. 수철리는 성동구 금호동 앞 나루터도 무쇠막나루터라고 했는데 한자로는 수철리나루로 썼던 것과 같다.

109번지 일대는 바탕거리라 하는데 바탕 또는 기본이 된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솥이나 농기구를 만드는 기계의 하나로 주물틀을 우리말로 바탕이라 했으므로 바로 솥을 만들기 위해 걸었던 바탕이 있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109-2번지의 바탕우물은 바로 무쇠막에서 사용하던 우물인데 벌겋게 달은 쇠를 식히는 것은 고운 모래나 물을 사용했는데 바탕우물의 물로 길러 쇠를 식혔다.

50 번지는 메주무수막이라 하는데 궁중이나 관헌에서 필요한 메주를 다량으로 쑤어서 바치는 일을 하던 곳인데 대개 도성 밖 4군데에서 하였다. 메주쑤는 곳은 우선 콩을 씻어야 하므로 물이 좋아야 하고 둘째, 운반이 용이한 곳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메주가마가 있는 곳은 물가에 있는 마을이 우선 선정대상이 되었다. 신수동의 메주무수막은 메주가마라고도 불렀다.

신수동 311~334-8번지에 이르는 길은 박석거리로 불렀다. 길이 질어서 박석을 깔아놓았다는 것인데 이곳에 살던 한부자가 비만 오면 질퍽해진 땅 때문에 가죽신에 흙이 묻는 것이 싫어서 하인들을 시켜 돌을 깔게 하면서부터 이름이 유래되었다. 신수동 371-1번지는 오원산·김진사동산 등으로 부르는데 처음에는 오씨가, 나중에는 김진사가 소유한 것이라 해서 명칭이 바뀌어졌다. 얕으막한 동산인데 경치가 아름답기도 한 이 산에 서면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으므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원수처럼 두 집안이 지냈다.

그 러다가 오씨가 먼저 동산을 차지하자 김진사는 관가에 오씨가 무사를 일으켜 역모를 도모하는 자금을 대고 있다고 거짓으로 고발하여 먼곳으로 귀양보내고 관가에서 재산을 몰수케 한후 김진사가 이를 재빨리 차지하면서 김진사동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서로 이웃해 있던 두집안의 싸움을 보다 못한 오씨의 딸과 김진사의 아들이 결혼을 하고 양 집안을 화해시키면서 그때부터는 오금동산으로 불렀다.

신수동 202-3번지의 장사바위는 박힌 바위라고도 하는데 힘센 장사가 이곳에 살았을 때 바위로 올라가면서 손톱과 발톱으로 긁었기 때문에 흔적이 남았는데 어느날 자다가 바위에 소변을 보자 구멍이 뚫어졌다. 일제 때 장사가 다시 태어날 것을 두려워했던 일인들이 그 구멍에 정을 박고 쇳물을 끓여 부어 넣게 함으로써 장사바위의 혈을 끊었다고 전하며 또 다른 전설로는 이곳에 살던 한 부부가 결혼하지 28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자 지나가던 탁발승이 시주를 하면 아이를 점지해주겠다는 말을 하였고 이에 노부부는 집안의 재산 절반을 뚝 떼어 절에 바쳤다. 얼마 후 부인의 몸에서 태기가 있었는데 열달이 지나도 출산을 못하고 1년이 넘어도 출산하지 못하다가 열다섯달만에 겨우 태어났다.

나오자마자 아이는 활을 쏘고 한손으로 커다란 나무를 뽑는 기이한 행동을 하였다. 놀란 노부부는 아이의 이러한 행동을 쉬쉬하며 감추었다. 이 무렵은 나라에서 장사는 반역을 꾀할 염려가 있으므로 모두 잡아들이라는 방이 붙었으므로 포졸들이 집집마다 장사가 있는지 여부를 조사할 때였다. 한편 젊었을 때부터 부인을 사모하고 있던 같은 동네의 홀아비 한사람이 이 집의 아이가 장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몰래 숨어들어 아이를 지켜보았는데 과연 장사인지라 혼비백산하여 그 즉시 관가에 고발하였다.

관원들이 아이를 체포하러 오자 일곱살된 장사는 바위를 던지며 저항하다가 한 포졸이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때를 놓치지 않고 포졸들이 달려들어 아기장사를 체포하여 처형하자 노부부의 상심은 매우컸다. 이에 남편은 쪽박산 위로 올라가 아이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자 산의 모양이 그 한숨소리에 줄어들어 쪽박처럼 작아졌고 부인은 한강으로 달려가 투신,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관헌과 싸우면서 아기장사가 던진 바위가 바로 박힌바위이다.

아현동(Ahyeon-dong)

아현동은 아현(阿峴) 혹은 아이고개·애고개라고 부르던 고개가 있어서 동명이 유래되었고 서소문밖에 위치하였 였다.

도성 4대문과 그 사이의 4소문 가운데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성밖으로 갖다 버리는데 사용하는 문은 주로 서소문(西小門)과 광희문(光熙門)인데 이 가운데 서소문은 서북쪽 지역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며 광희문은 동남쪽 지역 거주민들이 주로로 이용하였으므로 일명 시구문(屍口門) 혹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다.

서소문 밖의 시체매장지는 만리재·애고개와 와우산 등이 이용되었고 이 가운데서도 애고개는 특히 아이들 시체를 많이 매장했기 때문에 명칭이 붙었다. 그런가 하면 만리재가 너무 길고 높아서 마포나루 쪽으로 가자면 한나절 이상은 족히 걸리므로 이보다 서북쪽에 있는 작은 고개를 넘기가 쉽다는 뜻으로 만리재를 큰고개라 한데 비해서 아이 만큼이나 작은고개라는 뜻에서 불렀던데서도 연유되었다.

아현동에는 우물도 많이 있었는데 이는 수맥이 북악에서 아현을 지나 복개된 창전로쪽으로 지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03번지에는 말똥우물이, 양정중고등학교 뒷산에는 삼태우물,서아현파출소 앞에 파마우물, 산8번지에 쌍우물, 소의초등학교 후문께에 까치물이 있었고 너럭바우 밑에는 너럭바우샘이 있었으며 그외 호박밭 약물터·회나무우물도 있었다.

한편 아현동에는 활인서(活人署)가 있었다. 아현동 267번지·281번지 일대로 아현중고등하교·아현직업학교·아현초등학교 자리이다.

고려시대의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제도를 이어받아 1414년9월에 활인원(活人院)으로 개칭하면서 기구를 강화하였다. 그후 실질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유명무실하던 것을 영조때 부활시켜 활성화되었는데 1882년에 폐지되고 그 후 이사업은 혜민서(惠民署)업무와 통합되면서 제중원으로 이어졌고 다시 1905년에 설립된 대한적십자병원으로 계속되었다.

아현동의 풍습으로는 매년 정원 보름에 행하던 석전(石戰)을 들 수 있다. 변 전(邊戰) 혹은 편싸움이라고도 하는데 돌이나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싸움이다. 삼문(三門)밖과 아현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쫓고 쫓기면서 행하는 일종의 풍습인데 삼문밖의 주민이 이기면 서울부근에 풍년이 들고 아현이 이기면 8도에 풍년이 든다고 해서 삼문밖의 사람들도 아현쪽으로 붙어 아현패가 이기도록 하였다. 도성과 마포나루가 이어지던 길목에 있던 아현을 전국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싸움의 함성으로 천지가 진동하는데 싸움에서 혹시 부상을 했다 하더라도 상관치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어느쪽에서도 변상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예 정월 보름날은 다른길로 피해서 다녔다고 한다.

「서활인서터」

아현초등학교와 아현중학교 직업학교 자리에는 고려때의 '동서대비원' 제도를 이어받은 빈민의료기관인 '서활인서'가 세워져 성안 사람들의 질병치로는 물론 일대 빈민의 병을 치료하던 곳이었다.

「선통물천」

옛날 애고개쪽에서 마포(항)로 흐르는 개천을 거슬러 각종 삼남의 물품이 들어와 장안으로 반입되었으면 물건이 먼저 통과하는 개천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연남동(Yeonnam-dong)

연남동의 동명유래는 연희방 남쪽에 위치한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 연남동은 1975년10월1일 서울시조례 제 979호에 따라 연희동 일부를 떼어 연남동으로 하면서 생겨난 동인데 마포지역에서는 가장 역사가 짧다. 연희동에 속했던 연남동은 1867년에 만든 「육전조례」에 처음으로 한성부 북부 연희방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1894년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서서 연희방 성외 정자동계 정자동 염동1계 염동, 음월리계 음월리로 되어 있었다.

1910년 10월1일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면서 경기도 관할지역으로 격하되고 1911년 4월11일에 경기도령 제3호로 도성안을 5부 36방, 성밖을 8면제로 할 때 경성부 연희면에 속했고 1914년 4월1일 경기도고시 제7호로 고양군 연희면 연희리가 되었다. 1936년 4월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 구역이 대폭 확장됨에 따라 경성부 연희면이 되었다.

1940 년 7월1일 서부출장소의 설치로 이의 관할이 되었다가 1943년 6월10일 구제도의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 연희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1일 서대문구 연희동으로 바뀌었다. 1973년 7월1일 대통령령 제6548호로 서대문구 성산동과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편입되었으며 1975년 10월1일 대통령령 제7816호로 연희동 각 일부를 마포구로 편입함과 동시에 서울시조례 제797호로 편입된 연희동 일부지역을 연남동으로 개칭하였다.

1977년 9월1일 서울시조례 제1185호로 동교동 일부가 연남동에 편입되면서 0.65㎢의 면적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초에 연남동을 이루고 있는 지역은 연희동 지역중 서남쪽 접경으로부터 경의선까지 도로 중심 서북쪽의 도로와 철도와의 교차점으로부터 은평구 수색동에 이르는 서부지역이 되는데 성산대로의 개통으로 연희동 남측이 연남동으로 편입된 오늘날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연남동은 1970년대에 접어든 이후에 정비된 지역이 많으므로 비교적 산뜻하고 세련된 고급주택들로 이루어져 있다. 도시계획이 잘되어 있고 주택과 주택사이의 도로도 넓어서 서울시내에서도 대표적인 주거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연남동에서는 경성중·고등학교·경성여고·경성유치원으로 구성된 경성학원이 있으며 241-60~255-20번지 사이의 500여m의 가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연희로와 평행하는 복개된 개천을 따라 경의선 철로 아래를 통과하는 가로의 연변에는 서울에서도 유명한 순대국집이 있는데 택시기사들이 주로 이용하며 정보교환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염리동(Yeomni-dong)

염리동을 이룬 마을로는 느티나무배기 쌍룡대·개바위·마루보시사택·고추밭머리 등이 있다. 느티나무배기는 65~67 번 지 일대인데 느티나무가 언덕위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로 마을 수호신이나 동네입구의 정자나무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쌍룡대는 개바위 주변에 있던 마을인데 용 두 마리가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에 빈터가 생겼으므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구획정리가 되어 있는 지역으로 27-44번지 일대이다.

쌍룡대는 개바위 주변에 있던 마을인데 용 두 마리가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에 빈터가 생겼으므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구획정리가 되어 있는 지역으로 27-44번지 일대이다. 개바위는 바로 쌍룡산 남쪽 끝 27-88번지에 있는 개처럼 생긴 바위를 말하는데 철종때 이곳에 사는 인색하기 그지없던 장자(부자) 한사람이 자식이 없는 대신 큰 개 한 마리를 수십년간 길렀다. 자식이상으로 정든개였으나 어느날 갑자기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자 장자는 개를 찾아다녔다.

동 네 입구 쌍룡산 남쪽에 자신의 집에서 키우던 개와 비슷한 모습을 한 바위를 발견하고 너무나 반가워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자 장자쪽을 향해 개가 고개를 돌리고 컹컹 짓기 시작하였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개가 아니고 바위인데 장자가 오자 꼬리를 흔들면서 반가워했다. 바위로 변한 개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덧없음을 알고 재물을 풀어 동네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한편 자신은 정처없는 유랑을 떠났다. 이 개바위가 생긴 뒤로 마을에는 도둑이 없어졌는데 동네 사람들은 이때부터 개바위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정하고 장자가 동네를 떠난 매년 음력 7월1일을 기일로 정해 개바위에 제사를 지냈다. 개바위는 개가 아래를 쳐다보고 쉬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공기바위는 현 청소년독서실 뒤에 지름 2m 정도의 둥그런 바위 2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이 바위 위에서 천상의 옥황상제 궁녀들이 매월 보름이면 내려와 공기를 하였으므로 명칭이 유래되었다. 그러나 주변지역의 정리로 공기바위는 없어졌다. 마루보시사택은 178번지와 36번지 일대이다 .

염 리동 일대는 1936년 서울로 편입될 때 일본인 마루보시의 목장이었는데 이곳에 소속된 목동들과 관리인을 위한 사택을 지은 것이 마루보시사택이다. 개바위 아래에는 냉정(冷井)물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찬우물이라고도 하는데 장자집의 개가 집을 나왔다가 이 찬우물에서 물을 먹은 후 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찬우물은 개바위제사 때 사용된다.

한편 염리동은 글자 그대로 소금과 관련된 곳인데 동막역 부근에 소금창고가 있었으므로 이와 가까운 일대에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으므로 이름이 유래되었다. 이들 소금장수들은 동막에서 사온 옹이항아리에 소금을 담고 나루에서 부린 생선류와 서로 맞바꾸었다. 마포동의 소금머리골에는 소금배가 드나들던 소금전이 있었다.

150번지에는 아소정(我笑亭)이 있었다. 흔히 대원군 공덕리별장이라 부르는 이 아소정은 아흔아홉간으로 1893년부터 이곳에 대원군이 거주하였으며 1902년 2월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소정 울안에 산소를 썼으므로 일대를 한때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 하였다.

「아소정터」

지금의 동도고등학교자리에 있었던 '아소정'은 구한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실전후 사실상 운둔생활을 시작했던 아흔아홉칸의 별장으로1898년 대원군이 타계한 후 국태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 서대문에 있는 봉원사 대방(염불당)을 짓기 우해 이전되었으나 불타고 없어졌다.

용강동(Yonggang-dong)

용강동은 이곳이 고양군 용강면이었던 데서 동명이 유래되었다. 용강동을 이룬 동막리는 옹기를 제조하던 곳이 많 았기 때문에 옹리라 하던 것을 동이를 만드는 곳이라는 뜻의 동막(東幕)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동이를 제조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조선 초기때의 문인 성현(成俔)이 지은 「용재총화(庸齋叢話)」에도 나오는데 "사람이 사용하는 도기는 질그릇을 말하는데 도성에서 소요되는 항아리 종류인 와기는 노량·마포 등지에서 나오며 이곳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생업이 유지된다."하였다.

옹이 그릇은 젓갈종류나 김장을 하기 위한 그릇뿐만 아니라 술을 빚어놓는 그릇으로도 사용했다. 동막 부근이 좋은 소주가 생산된다는 사실은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나타나는데 이에 의하면 공덕·옹막 사이에서 생산되는 약주의 진품인 삼맥주(三麥酒)는 양조법이 까다로워 일반소주와는 다른 맛을 내는데 수백 내지 수천독씩 빚어냈다고 한다. 이 삼맥주는 노란 빛을 띠는데 마시면 마치 이슬을 먹은 것처럼 산뜻하지만 그냥 두면 기름이 낀 것처럼 탁하다고 하였으며 오장에 특히 좋은 술이라 하였다.

용강동이라 이름지었던 까닭은 이곳의 마포강이 마치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풍수지리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149번지 일대에 있던 우물을 작은우물, 430번지 부근에 있던 우물은 큰우물이라 했는데 큰 우물은 동막사람 모두가 마실 만큼 수량이 풍부한 우물이었다. 작은 우물은 여름철 배탈이 났을 때 효과가 있었다고 하는데 톡 쏘는 듯한 맛이 있었다. 이로 보아 아마도 탄산성분이 함유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용강동 335번지에는 서울시 민속자료 제17호로 1977년 3월17일 지정된 정구중(鄭求中)집이 있다. 이 가옥은 동향으로 배치된 구가형(口家形)집으로 안채, 행랑채, 별당이 따로 축조되어 있으며 안채뒤에 있는 별당은 전형적인 ㄱ자 집이다. 이 가옥은 도시의 제약된 좁은 대지 안에 전통적인 안채에 별당채까지 갖추어 오밀조밀한 깊은 맛을 보여주는게 특징이며 1920년대 이후 한식주택의 면모를 보여주는 개량한옥으로서 보기드문 예인 것이다.

이 집에 들어서면 넓지 않은 마당에 측백나무, 철쭉, 목련, 장미, 소철, 사철나무, 난초롱이 있어 운치를 더해주는데 이집은 구한말 용강동의 부농인 이모씨가 무남독녀에게 주기위해 당시 장안에서 이름난 4대 목수중의 하나인 연영달씨를 시켜 지었다고 하며 목재는 압록강 유역의 홍송과 백송을 뗏목으로 옮겨와 한강에 2년동안 잠겨 놓았다가 1년간 건조한 후 못을 전혀 사용치 않고 지었다는 것이다.

용강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토정길의 연변은 마포주물럭갈비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처음에는 전차를 이용한 승객들이 종점인 이곳에 내려 퇴근길에 주로 이용하던 주점의 술안주로 개발해낸 것인데 돼지고기의 특유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몇가지 양념을 섞어 만들었다. 사람들의 입맛이 변함에 따라 마포주물럭갈비라는 대명사로 바뀌었고 재료도 점차 고급화되어 점차 쇠고기로 바뀌어지면서 마포를 알리는 명물로 바뀌어졌다.

토정길 북쪽은 옛날 지번 그대로이나 그 남쪽은 구획정리가 되어 비교적 반듯반듯한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토정 이지함 집터」

무소유를 실천한 자유인이자 조선3대 기인이며 토정비결의 저자로 더 잘 알려진 토정 이지함 선생이 살던 집터로 토정동 한강 삼상아파트 자리에 표석이 있다.

「정구중가」

서울시 민속자료 제17호로 1977년 3월 17일 지정된 정구중씨 집으로 대지는 241평에 건평 71평으로 1920년에 건축된 집이다.

「삼개포구」

마포의 옛 포구 이름으로서 토정동 강변도로 아래에 삼개포구의 표석이 있다.

합정동(Hapjeong-dong)

합정동에는 조개우물이 있었다 하여 동명이 유래되었다. 합정동의 유래가 되는 조개우물은 지금의 절두산순교 박 물관이 세워진 근방인데 처형장이던 이곳에서 망나니들이 사형도구로 쓰는 칼을 갈고 물을 품기 위해서 팠던 우물이다. 우물바닥에 조개껍질이 많아서 조개우물로도 불렀는데 이 우물은 천주교인을 한참 탄압할 무렵 이곳에서도 고문을 자행할 때 사용되었다. 천주교인의 물고문용 우물이라 할 수 있는데 강변도로의 건설로 없어졌다.

합정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곳은 서울외인묘지공원과 양화대교 진입 인터체인지 및 한강시민공원과 절두산순교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양화대교가 놓여진 곳은 조선시대 서울을 출입하던 나루터인데 「동국여지비고」권2 산천조에 의하면 "양화도는 서강나루에 있는데 처음에는 나루지기인 도승을 두었으나 후에 별장을 두었다"고 하였고 관방조에는 "양화진은 1754년에 설치한 것으로 어영청 소속으로 별장이 있고 아장이 200명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 외 각종 문헌에도 양화나루에는 나루지기가 있으며 방어를 위한 진(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곧 고려 이래로 양천·강화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 양화나루를 건너야 했으므로 영조 이후에는 송파진·한강진과 함께 서울 3진으로 요충지였다. 잠두봉 서쪽의 양화대교 동쪽지점인 양화나루를 큰나루라 하였으며 맞은편은 안양천이 유입되어 합류되는 지점을 연결하였다. 이 나루는 바다와 통해 있으므로 경상·전라·충청·경기도의 공세와 미곡을 서강의 광흥창까지 운반하는 조운(漕運)전용항구였다.

조선초에는 용산강을 한강 으뜸의 항구로 쳤으나 수위가 낮아지면서 하류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는데 1591년의 기록이나 1636년의 기록에서도 수위가 얕아져 양화나루 이상은 배가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

한편 양화나루 근방은 경치가 매우 뛰어난 곳이었다. 절두산성당이라 부르는 곳은 마치 누에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어서 잠두봉이라는 표현을 하고 그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정경은 그림과도 같았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용산서쪽에 마포·토정·농암 등의 강마을이 있어 모두 서해와 통하므로 8도의 배가 모여 들게 되어서 성내외 공후 귀족들이 모두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놀이와 잔치장소로 삼았다"고 하였다.

한 강진에서 시작된 뱃놀이의 마지막 지점이 되는 잠두봉 아래의 양화나루에 대해서 명나라 사신 예겸이 "도성에서 서남으로 15리쯤 가면 나루터가 있어 양화도라 하는데 대개 각 도에서 오는 군량이 와서 닿는 곳이다. 나루 어구에 푸른 돌이 수리나 되는 듯한 넓은 산이 물가에 벽처럼 섰는데 푸르고 늙은 소나무가 많아서 마치 높은 관을 쓰고 칼을 든 이가 섞여 서서 서로 마주한 것 같다.

여기에 올라가면 한없이 조망이 좋았기에 걸어서 돌깔린 산마루에 올라가 소나무를 의지하여 모두 나무를 엮어 만든 난간에 기대고 바라보니 멀리 가까이 있는 돛단배들이 그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언덕 저 멀리에 기름진 논밭이 많고 촌가가 총총히 있다"는 표현을 한 것을 보아 이곳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경치의 잠두봉 아래 모래밭은 조선 후기에 가면 일대변혁이 이루어지게 된다. 곧 앞서도 설명한 바 있듯이 천주교인의 대량 처형장소로 바뀌어졌던 것으로 후일 절두산천주교성지라 불리는 곳이다. 합정동 96-1번지에 세워진 천주교 절두산순교박물관 자리에서는 병인박해 때 프랑스신부 9명과 남종삼바오르 등이 처형당하였다.

많 은 사람들이 처형당하면서부터 잠두봉은 절두산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강뚝에서는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김옥균의 시체가 효수된 일도 있었다. 합정동 144번지에는 외국인묘지공원가 있다. 양화진 진대(鎭臺)의 뒷동산에 해당되는데 1885년 임금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다음해부터 묘를 쓰기 시작해서 약 500기의 묘가 있다.

입구 가까이 있는 것은 대한매일신보사장 배설의 묘와 우리나라 종교계·교육계에 공이 많은 언더우드부부와 그의 친묘, 이화여대에 공이 많은 아펜셀러·앨리스·베백카를 비롯해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설립자 더글라스·비·에비슨의 묘도 있다. 또한 1991년 4월 17일에는 대한결핵협회장으로 한국결핵사업의 선구자 셔우드 홀이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망원정지」

망원정은1424년 효령대군이 지은 별장으로 1925년 큰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89년 복원된 정자로 예전에는 '희우정'으로 불리웠다.(서울시문화재 기념물 제9호)

「잠두봉 절두산 성지」

조선후기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 등과 많은 천주교신자가 처형당한 곳으로 순교 기념관이 있다.(구가지정 문화재 제3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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